그 길만의 고유한 온도와 아날로그의 역사를 압축한 첫 문장
자취생과 고시생의 허기가 다진 골목에 지하철이 닿았고, 어느 날 관악구가 이 거리 전체의 이름 밑에 도장을 찍었다. 반백 년 가까운
전쟁통에 미군 부대 통조림이 흘러들어와 생긴 이름이, 지금은 밤마다 불을 켜는 야시장이 되었다. 몇 걸음 옆에는 영화인들의 손자국이
조선의 관아가 있었고, 그다음엔 법원과 은행이 있던 자리. 관공서가 모두 떠나고 한동안 아무도 반기지 않던 이 골목에, 다시 불을 켠
은행나무 정자가 있던 마을에서 시작해, 관공서가 떠난 자리에 LED로 다시 불을 켠 거리. 화려해진 이름 아래에는 여전히 오래된 결의
노량진 학원가 수험생들의 한 끼였던 노점은, 자리를 옮기고 간판을 세우며 지금의 골목이 됐다.
한때 스무 곳이 넘던 포장마차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골목이 됐다. 지금 남은 것은 열넷, 그리고 그사이 소리 없이 자리를 잡은 몇 개
피난민의 보따리가 부전역 앞에 내려진 뒤, 이 골목은 생선과 명란김밥과 수제 양과자가 나란히 쌓이는 여섯 개의 시장이 되었다.
명태와 오징어를 나르던 지게에서 흘러내린 바닷물이 이 비탈길의 이름을 만들었다. 탄광과 어업이 함께 떠난 뒤, 그 가난한 담장에 20
구미역 뒷골목, 전봇대를 걷어내고 인도를 넓힌 자리에 제일 먼저 들어선 건 가게가 아니라 걸음이었다. 그 걸음을 따라 카페가 뒤따라왔
제기동이라는 이름은 제사를 지내던 터에서 왔다. 그 터 위에서 지금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한약재가 오가고, 그 틈새로는 옛 극장을 고친
모란(牡丹)이라 불리지만 유래는 꽃이 아니다. 두고 온 봉우리 하나를 그리며 연 5일장이, 반세기를 지나 수도권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
조선의 병사를 지키려 쌓은 성벽은 신자들이 묶여 죽은 자리가 되었고, 지금은 호떡집 앞에 선 줄을 지킨다. 해미읍성은 지키는 일을 한
천안역 앞 패션 골목이 번화가였던 시절을 아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상권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조
영화관 하나가 동네의 이름이 되는 일은 흔치 않다. 춘천 육림고개는 그 드문 경우 가운데 하나다. 극장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안동 구시장 한편, 통닭을 튀기던 좁은 골목은 전국 치킨 브랜드가 밀려들자 다른 길을 택했다. 지금 이 골목에는 같은 메뉴를 내건 간
부산진구 전포동의 이 골목은 한때 기계 부품과 나사를 팔았다. 그 거리가 통째로 비었던 적이 있고, 다시 채운 것은 상인이 아니라 커
이름부터가 창고였던 동네다. 세곡을 쌓아 두던 자리가 번화가가 되었다가 텅 비었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다시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대구 한복판,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시간이 흐르는 좁은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의 이름은 그저 '길다'는 뜻이다. 그런데
창평면 삼지내마을. 월봉산에서 내려온 물이 월봉천, 운암천, 유천 세 갈래로 갈라지는 자리에 조선은 현청을 두었다. 느림이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의 부사는 이 구릉의 생김새를 보고 봉황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로부터 이백 년 가까이 지나, 그 날개 아래 골목은 또
광주송정역 맞은편, 백 년도 더 전에 역과 함께 생겨난 시장이 있다. 한 번은 청년의 손으로 다시 태어났고, 지금은 그 다음을 묻고
두터운 바위에 자손을 빌던 자리에,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참배길이 났다. 그 계단을 지금은 전혀 다른 이유로 오른다.
봉래산이 바다로 뚝 떨어지는 그 끝에서 마을이 시작된다. 일흔 해 전에는 피할 곳이 없어 멈춰 선 자리였고, 지금은 사람들이 일부러
조선의 사신이 묵던 집 뒤편 골목이, 서울의 한 동네 이름을 빌려 쓰며 전주에서 가장 젊은 거리가 되었다. 재개발로 묶여 있던 10년
바로가기 등록하시면, 더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