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왕십리 곱창골목) 열넷 남은 화덕
한때 스무 곳이 넘던 포장마차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골목이 됐다. 지금 남은 것은 열넷, 그리고 그사이 소리 없이 자리를 잡은 몇 개의 다른 불빛이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13
- 골목
- 서울 왕십리 곱창골목

왕십리역 2번 출구를 나와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붉고 노란 간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제일, 왕초, 정부. 저마다 다른 글씨체로 걸린 이름들이 좁은 거리 양편에 줄지어 있다.
이 거리가 곱창집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이다. 가까운 마장동 축산물시장과 거래가 닿는 자리라, 소고기보다 값싼 부속 고기를 다루는 가게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마장동 도축장은 1998년에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산지와 맺어 둔 거래는 끊어지지 않아서, 가게들은 이름만 왕십리에 남긴 채 지금도 고기를 받아 온다.

모여서 다시 켜진 불
처음부터 이 모습은 아니었다. 포장마차들은 한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한꺼번에 정비되는 과정을 거치며 성동구청 건너편 이 자리로 옮겨 모였다. 흩어져 있던 불빛들이 한곳으로 옮겨붙은 셈이다.
2004년 한 신문이 이 거리를 취재했을 때는 이름이 조금 달랐다. 당시 행정동이던 왕십리1동의 곱창거리로 소개됐고, 좁은 구릉길 양쪽으로 200미터쯤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영업은 오후 5시쯤 시작해 다음 날 아침 5시에서 6시까지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소고기를 사 먹기 어려웠던 이들이 그보다 값싼 곱창으로 허기를 채우던, 밤이 깊을수록 오히려 북적이던 거리였다.

숫자가 줄어드는 동안
성동구는 2014년부터 서울시의 K푸드 특화거리 지원계획에 따라 이 일대를 다시 손봤다. 낡은 안내 표지판을 바꾸고 외국어 메뉴판을 만들어 붙였다. 포장마차의 흔적을 지우듯, 가게들은 하나둘 깔끔한 인테리어의 현대식 매장으로 모습을 바꿨다.
2015년 한 신문이 다시 이 거리를 찾았을 때 남은 가게는 열네 곳이었다. 스무 곳이 넘던 가게 중 여섯 곳의 불이 꺼지는 동안에도, 남은 열넷은 밤마다 같은 자리에서 화덕을 지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골목의 점포 수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열네 곳 안팎이다.

그 열넷 가운데는 중소벤처기업부가 백년가게로 인정한 집도 있다. 입구 유리벽에는 다녀간 유명인들의 사인이 빼곡하고, 벽 한쪽에는 방송에 나왔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오래 버틴 가게일수록 벽에 걸어 둘 것이 많아진다.
화덕만 있는 게 아니다
저녁이 되면 골목은 고기 연기로 가득 찬다. 그런데 그 사이, 낮 여덟 시부터 문을 여는 카페 한 곳은 저녁이 오기 전까지 원두 가는 소리만 나직이 흘려보낸다. 조금 더 걸으면 치킨과 숯불 바베큐를 함께 파는 가게도 있어서, 이 거리의 간판이 전부 곱창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곱창골목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가게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열넷 남은 화덕이, 이름값을 하는 자리를 아직은 지키고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