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이름은 흐르는 물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창평면 삼지내마을. 월봉산에서 내려온 물이 월봉천, 운암천, 유천 세 갈래로 갈라지는 자리에 조선은 현청을 두었다. 느림이라는 이름은 그보다 훨씬 나중에 왔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삼지내마을, 혹은 삼지천마을. 두 이름 모두 지형을 그대로 설명한다. 마을 동쪽 월봉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월봉천, 운암천, 유천이라는 세 개의 이름을 달고 마을 앞에서 갈라진다. 세 개의 연못이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석 삼(三), 연못 지(池), 속 내(內) 자를 쓰면 삼지내가 되고, 세 개의 하천이 한데 모인다는 뜻으로 읽으면 삼지천이 된다. 물줄기 이름도, 그 물을 부르는 마을 이름도, 결국 같은 지형을 다르게 옮겨 적은 것일 뿐이다.
마을을 둘러싼 산세를 두고는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 행주형 명당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전해진다. 월봉산의 완만한 능선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라고, 이 마을을 소개하는 글들은 입을 모은다. 배는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라 교역을 일으키는 물건이니, 풍수를 믿는 이들에게는 부를 상징하는 땅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마을은 한때 그런 땅값을 하는 자리였다.
이 물가를 처음 고른 것은 여행객이 아니라 행정이었다. 1793년, 창평현령 조광존은 현청을 고서면 고읍리에서 지금의 창평면 자리로 옮겼다. 삼지내마을은 그날부터 창평현의 읍치, 그러니까 고을의 중심이 됐다. 지금 마을 어귀에는 한옥 모양으로 지어진 면사무소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현판에는 여전히 창평 현청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다.

창평이라는 이름 자체도 1793년에 처음 생긴 것은 아니다. 이 일대는 삼한시대에는 구계국, 백제시대에는 굴지현, 신라시대에는 기양현으로 불렸다. 고려에 들어서야 비로소 창평현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중앙에서 현령이 파견됐다. 조선시대 한때는 현이 철폐되어 광주목에 딸린 적도 있었는데, 1479년에 다시 창평현으로 복구됐다. 지금의 창평이라는 이름 뒤에는 이렇듯 몇 번이나 지워졌다 되살아난 행정구역의 이력이 겹쳐 있다.
읍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군과 면을 통폐합하면서 창평군은 폐지됐고, 담양군에 편입되며 지금의 창평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을의 중심이던 자리가 그렇게 한 지역의 면 소재지로 작아졌다. 작아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 시절 지어진 고택들이었다.
담양 고재선 가옥은 대문을 지나도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ㄱ자로 몸을 틀어 앉혔다. 이웃한 고재환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마당을 ㅁ자로 둘러싸고 있다. 1925년에 지은 집과 1933년 무렵에 지은 집이 몇 걸음 거리를 두고 마주 본다. 바깥에서 안채가 한눈에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짓는 방식은, 손님을 들이되 가장 안쪽 생활은 가리고 싶었던 당시 살림살이의 태도를 보여준다. 을사늑약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춘강 고정주의 고택도 이 골목 안에 있다. 세 집 모두 전라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느림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돌담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 흙과 자연석을 번갈아 쌓아 올린 담장이 집과 집 사이, 집과 길 사이를 가른다. 2006년 6월, 이 담장은 국가등록문화재 제265호가 됐다. 담장 하나에 번호가 매겨지는 순간, 그저 집을 두르던 돌무더기가 지켜야 할 유산으로 격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12월, 국제슬로시티연맹은 삼지내마을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했다.
슬로시티는 지역이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도록,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운영하는 국제적인 운동이다. 유엔이나 유네스코가 매기는 등급이 아니라, 이 연맹에 가입한 지역들끼리 서로의 속도를 인정해주는 느슨한 연대에 가깝다. 수백 년을 이어온 고택의 보존 상태와, 전통 방식으로 창평엿을 고아 온 마을의 식문화가 이 마을을 아시아 첫 사례로 밀어 올린 이유로 꼽힌다. 국밥과 함께 창평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창평엿이 먼저 거론되는 것도 그래서다.

느림이라는 말은 그래서 이 마을에 한참 뒤늦게 도착한 수식어다. 담장이 먼저 있었고, 현청이 먼저 있었고, 고택이 먼저 있었다. 그 오래된 것들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 하나가, 국제기구로 하여금 이 마을에 느림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다.
지금도 물은 세 갈래로 갈라져 돌담 밑을 지난다. 400년 전 현령이 이 자리를 고른 이유와, 2007년 국제연맹이 이 마을을 고른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둘 다 결국은 이 땅이 가진 물과 산의 형국, 그리고 그 위에서 오래 버텨온 집들을 눈여겨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을의 중심이던 땅에서 면 소재지로, 다시 느림이라는 이름으로. 이 마을이 거쳐 온 세 번의 호칭 중 지금 것이 가장 낯설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세 갈래 물줄기도, 고택의 담장도, 처음 그 자리에서 크게 움직인 적이 없다. 이름만 그 위를 몇 번 바꿔 흘러갔을 뿐이다.
슬로시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이 마을이 박물관으로 멈춰 선 것은 아니다. 돌담길 안쪽에는 지금도 실제로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맨발 황톳길이 따로 나 있다.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그 담장 옆에서, 누군가는 신발을 벗고 매일 걷는 길을 걷는다. 창평읍내에서 차로 오 분이면 닿는 거리라, 마을 밖 생활권과도 그리 멀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