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돌담은 계절마다 다른 것을 얹는다
여름이면 담장 위로 장미가 넘어오고, 겨울이면 그 자리에 눈이 쌓인다. 같은 돌 위에서 계절은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돌담은 흙과 자연석을 번갈아 쌓아 올렸다. 반듯하게 재단한 돌이 아니라 생긴 그대로의 돌을 썼다. 그래서 담장은 집집마다 표정이 조금씩 다르다. 낮은 담, 조금 더 낮은 담, 이끼가 짙게 앉은 담.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라진다고 여러 사람이 적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정적을 깨우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공기. 차가 다니지 않는 돌담길을 걷다 보면 높고 낮음이 없는 소박한 한옥들이 이어진다.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여름에 이 담장 앞을 지나면 담쟁이와 넝쿨장미가 기와지붕 선 위로 넘어와 있다. 짙은 분홍 꽃송이가 돌 틈 사이로 늘어진 모습을 담아 온 블로거가 있었다. 꽃은 담장의 거친 표면과 맞닿으며 핀다. 같은 계절, 다른 담장에서는 붉은 접시꽃이 고개를 내밀고, 그 아래 작은 물길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고 적은 기록도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에는 능소화가 고풍스러운 대문 앞에서 여행객을 맞이했다는 기록도 있다. 붉은 능소화가 전통 가옥과 어우러진 풍경을 두고, 그 손님은 한 폭의 동양화 같다고 적었다.

겨울은 전혀 다른 풍경을 내놓는다. 같은 담장 위에 눈이 얹히고, 기와 골마다 흰 선이 그어진다. 눈 덮인 돌담길을 대각선으로 담은 사진 한 장은, 여름의 장미 사진과 같은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른 공기를 담고 있다.
책을 읽듯 걷는 골목
이 마을을 걸은 기록 중에는 시 한 편도 섞여 있다. 시인 김휼(본명 김형미)은 2026년 펴낸 시집 『받아요, 한 다발의 침묵』에 '산冊, 고서를 읽다'라는 작품을 실었다. 冊은 보통 책을 뜻하는 글자지만, 대나무나 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를 가리킬 때는 '산'이라 읽는다고 한다. 세 갈래 물줄기로 둘러싸인 삼지내마을을 울타리이자 한 권의 오래된 책으로 읽어낸 제목이다.
시는 월봉산에서 발원한 빛과 물이 세 갈래로 휘감아 흐르는 골목을 "행간"이라 부르며 그 사이를 유유자적 따라간다고 적는다. 눈이 피곤해질 즈음에는 "쉼표처럼 놓인 남극루"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다. 흐르는 것이 멈춘 것을 어루만지고, 멈춘 것이 흐르는 것을 쓰다듬는 마을이라는 구절도 있다. 돌담은 멈춰 있고 물은 흐른다는, 이 글이 사진으로 담아온 바로 그 대비를 시인은 한 문장으로 묶어냈다.

이 시를 소개한 블로거는 자신이 사는 충청남도의 외암민속마을이나 반교마을과 비슷한 정취일 것 같다고 적었다. 가본 적 없는 마을인데도 글만으로 짐작이 간다는 뜻이다. 고서를 다 읽은 화자 위로 구름이 내려오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는, 이 마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책이 되기도 한다고 풀이했다.
정자에 앉아 들판을 본다
시인이 쉼표라고 부른 그 정자가 바로 이곳이다. 마을 한쪽에는 정자가 있다. 기둥만 남은 듯 사방이 트인 구조라, 마루에 앉으면 들판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늦여름 이곳을 찾은 어느 가족은 배롱나무가 분홍빛으로 흐드러진 풍경을 등지고 아이를 계단에 앉혔다. 아이는 등을 보인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자 기둥 사이로 보이는 것은 논과 밭, 그리고 그 너머의 산이다. 마을 안쪽 돌담길이 사람의 시간을 보여준다면, 이 정자에서 보는 풍경은 계절이 바뀌는 시간을 보여준다. 모내기를 마친 논이 초록으로 채워지고 벼가 익으면 황금빛으로 바뀌는 그 변화를, 정자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지켜본다. 사람은 계절마다 바뀌어 찾아오지만, 그 사람들을 맞는 정자의 자리는 늘 같다.
마을의 담장 너머로는 다른 시간의 흔적도 섞여 있다. 고택 지붕 사이로 뾰족한 첨탑 두 개가 솟은 풍경을 담은 사진도 있다. 한옥과 서양식 건축이 한 시야 안에 들어오는 그 장면을, 어느 블로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공존하는 모습이라고 적었다. 돌담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예상 밖의 풍경과 마주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이 마을이 품고 있는 시간이 한 겹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흙과 자연석을 번갈아 쌓은 담장 아래로는 작은 물길이 함께 흐른다. 졸졸 흐르는 그 물소리가 돌담길을 걷는 동안 발걸음을 따라온다. 고택 마루에 앉아 차 한 잔을 기울이며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적은 사람도 있었다. 이 마을에서 듣게 되는 소리는 대개 이런 작은 것들이다.
돌담길 곳곳에는 옛 우물터도 남아 있다. 지금은 더 이상 물을 긷지 않지만, 그 자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옛사람들의 삶의 숨결을 느낀다고 적는다. 능소화가 핀 대문과 우물터, 돌담이 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을 두고, 삼지내마을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면서도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온기가 함께 느껴지는 곳이라고 쓴 기록도 있다.
돌담도 정자도 자리를 옮긴 적이 없다. 옮겨 다니는 것은 계절과, 그 계절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다. 담장 위에 장미가 질 때쯤이면, 누군가는 이미 다음 겨울의 눈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고서를 다 읽은 자리 위로 구름이 내려오듯, 이 골목을 다 걷고 난 자리에는 저마다 다른 날씨가 내려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