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약령시장) 제사 지내던 자리가, 약을 짓는 자리가 되었다
제기동이라는 이름은 제사를 지내던 터에서 왔다. 그 터 위에서 지금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한약재가 오가고, 그 틈새로는 옛 극장을 고친 카페의 불빛이 새로 켜진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13
- 골목
-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약령시장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를 나서면 가장 먼저 코끝에 와닿는 것이 있다. 은은하게 깔린 한약재 냄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가늠하기도 전에 그 냄새는 이미 길 전체에 스며 있고, 처음 이 동네를 찾은 사람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자신이 다른 구역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이 동네의 이름은 약재에서 온 것이 아니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던 터라는 뜻이다. 지금의 제기동에 있던 선농단에서 임금이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빌며 제사를 지냈고, 그 제사가 열리던 자리라는 뜻에서 이 동네에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이 땅이 처음 역사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약이 아니라 기원이었다. 무언가가 잘되기를 비는 자리였다는 뜻이다.
농산물시장에서, 한약의 심장으로
지금 우리가 아는 경동시장은 1960년 6월에 문을 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의 살림이 조금씩 돌아오던 때, 경기 북부와 강원도에서 열차를 타고 들어온 농산물들이 청량리역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그 짐을 부리고 사고파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시장이 되었다. 처음부터 약을 팔자고 세운 시장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약의 자리가 된 것은 그다음이다. 조선시대, 흥인문 밖에는 보제원(普濟院)이라는 곳이 있었다. 관리와 여행자에게 잠자리를 내주면서 약도 함께 다루던 기관이었다고 하며, 그 터에 뿌리를 둔다는 이야기가 지금의 서울약령시로 이어진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종로4가와 종로5가에 흩어져 있던 약재상들이 1970년대에 하나둘 제기동으로 옮겨오면서, 비로소 이 자리가 한방 전문시장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경동빌딩이 들어서면서 대규모 인삼시장과 한약 전문 상가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 사실은 이제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다. 약령시 입구에 서 있는 비석 하나에는 '서울京東藥令市 傳統韓藥市場으로 指定함 1995年 6月 1日 서울특별시'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1995년 6월 1일, 서울시가 이 자리를 공식적으로 전통한약시장지역으로 지정했다는 기록이다. 자연스럽게 모여든 시장이 어느 날부터 이름과 경계를 가진 구역이 된 셈이다. 지금 이곳에는 한의원과 한약방, 약재상을 합쳐 1,000여 개의 업체가 모여 있고, 전국에서 거래되는 한약재의 70% 안팎이 이 골목을 거쳐 간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골목에는 무엇이 있는가
약령시라는 이름만 들으면 이 골목 전체가 한약방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걸어보면 그렇지 않다. 약재 냄새가 깔린 골목 바로 옆으로 국수를 삶는 김이 피어오르고, 몇 걸음 더 가면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냄새가 끼어든다. 한약방 간판과 순댓국집 간판이 같은 처마 아래 나란히 걸려 있는 풍경은 이 시장에서 전혀 낯설지 않다.
그 섞임이 최근 들어 한 겹 더 두꺼워졌다. 경동시장 본관 3층과 4층에는 2019년 8월, 국비와 시비와 구비를 합쳐 청년몰이 들어섰다. 베이커리와 소품 가게, 공방이 모인 이 공간은 약재 좌판만 보고 들어온 사람의 발걸음을 다른 층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몇 해 뒤인 2022년 12월에는, 오래전 문을 닫았던 경동극장 자리에 스타벅스가 들어섰다. 매장 이름은 '경동1960'. 극장이 지어진 해를 그대로 가져온 이름이다. 높은 천장과 계단식 좌석을 고스란히 남긴 채, 무대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커피를 내리는 사람들이 서 있다.

이 모든 변화를 비집고 들어온 작은 가게 하나가 있다. 오래된 한약방의 나무 서랍장을 그대로 살려 벽을 채우고, 그 서랍 위로 빛이 새어 나오는 종이봉투들을 매달아 조명으로 쓰는 카페다. 이름마저 '커피한약방'이다. 한약을 지어주던 자리가 이제는 커피를 내려주는 자리가 되었는데도, 그 공간은 자신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내력을 간판에 그대로 걸어 둔다.
그러니 이 골목을 한 단어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매번 틀릴 수밖에 없다. 약전골목이라 부르기엔 순댓국집과 스타벅스가 너무 많고, 레트로 핫플레이스라 부르기엔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약봉지를 싸는 손들이 여전히 많다. 이 골목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이고, 그 둘이 한 통로 안에서 매일 어깨를 스친다.
제사를 지내던 땅 위에 약을 짓는 자리가 들어섰고, 그 약을 짓는 자리 사이사이로 다시 커피를 내리는 자리가 들어섰다. 처음 이 땅에 사람이 모여 빌었던 것이 풍년이었다면, 지금 이 골목이 조용히 비는 것은 어쩌면 다음 세대에도 이 자리가 여전히 북적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