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약령시장) 냄새가 먼저 마중 나오는 골목
제기동역 2번 출구를 나서기도 전에, 이 골목은 걸음보다 코가 먼저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냄새를 따라 걷다 보면, 하루의 시간마다 전혀 다른 골목이 기다리고 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13
- 골목
-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약령시장

제기동역 2번 출구 계단을 오르기 전부터 냄새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약재 특유의 은은하고 마른 향이다. 어디 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게 아니라 골목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어서, 처음 온 사람은 그 냄새의 출처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출처를 하나로 짚을 수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이 골목의 공기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좌판이 시작되는 지점부터는 눈이 바빠진다. 익숙한 인삼과 홍삼 옆으로 당귀와 황기가 쌓여 있고, 조금 더 걸으면 이름조차 낯선 뿌리와 열매들이 소쿠리마다 다르게 담겨 있다. 그 사이사이로 채소와 과일을 파는 좌판이 끼어든다. 약재만 파는 거리일 거라 짐작하고 왔던 걸음은 이쯤에서 한 번 고쳐 잡아야 한다.
골목과 골목 사이, 공기가 바뀌는 지점
본관을 지나 신관으로, 신관을 지나 또 다른 재래시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생각보다 넓다. 한 바퀴를 돌아보겠다고 가볍게 들어선 걸음이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약재상 골목을 걷다가 서울한방진흥센터로 들어서면 공기가 또 한 번 바뀐다. 시장의 활기 대신 낮고 차분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벽을 가득 채운 나무 약장과,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소리만 남는다.

겨울이 오면 이 거리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간판 위로 눈이 얇게 내려앉고, 좌판을 덮은 천막 모서리마다 눈이 쌓인다. 추위에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금 빨라지지만, 약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큼은 여름보다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온풍기 바람과 함께 약재 냄새가 한층 진하게 끼쳐 온다. 추운 날의 그 냄새는 여름의 그것과 분명히 다르게 다가온다.
경동시장 안으로 깊이 들어서면 공기는 또 한 번 바뀐다. 약령시의 조용한 긴장이 풀리고, 대신 활기차고 왁자지껄한 재래시장 특유의 에너지가 밀려든다. 생선 좌판의 물비린내, 나물 좌판의 흙냄새, 그 사이를 오가는 손수레 바퀴 소리가 뒤섞인다. 몇 걸음 차이로 이렇게까지 공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시장을 걸을 때마다 새삼스럽다.
평일이라고 한산하지 않다. 오히려 주말보다 평일 오전에 더 깊은 밀도를 느낄 때가 있다. 장바구니를 든 손님과 좌판을 정리하는 상인의 손이 좁은 통로 안에서 쉴 새 없이 스친다. 어깨가 부딪힐 듯한 간격으로 서로를 비켜 가면서도 누구 하나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오래 이 길을 오간 이들의 몸에 밴 요령 같은 것이다.

점심 무렵이 되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먹자골목 쪽으로 기운다. 국밥 끓는 김과 칼국수 면을 삶는 김, 빈대떡 부치는 기름 냄새가 한데 섞여 골목 입구까지 퍼진다. 그 앞에 줄을 서 있던 사람도,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도 표정이 비슷하다.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을 받아 들면 오전 내내 걸었던 피로가 그제야 풀리는 듯한 얼굴들이다.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둔 다른 시간
경동1960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 소음이 한풀 꺾인다. 극장이었던 시절의 높은 천장과 계단식 좌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커피를 마신다. 시장 투어를 하다가 잠시 다리를 쉬어가는 이들도 있고, 처음부터 이 공간만을 목적지로 삼고 온 이들도 있다. 아래층의 활기와 이 층의 정적이 한 건물 안에서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다.
비 오는 평일 늦은 시간에 이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다. 좌판을 덮은 비닐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를 배경으로 한적하게 걷는 발걸음. 사람이 많이 없어 오히려 거리의 민낯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낮 동안 쌓인 소음이 걷히고 나면, 이 골목도 결국 오래된 간판과 낡은 셔터로 이루어진 평범한 거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좌판들이 하나둘 거두어진다. 하루 종일 펼쳐 있던 약재와 나물이 상자에 담겨 안으로 들어가고, 셔터가 내려오는 소리가 골목 끝에서부터 순서대로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이 거리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난다.
셔터가 다 내려온 뒤에도 몇몇 불빛은 남는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노포의 불빛, 경동1960의 샹들리에 불빛. 그 불빛들은 낮의 소란과는 다른 종류의 온기를 거리에 흘린다. 약을 짓던 손들이 쉬는 시간에, 다른 손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불을 밝히는 셈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제기동역 2번 출구에서는 다시 같은 냄새가 마중 나올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약재 봉지가 쌓이고, 똑같은 통로에서 사람들이 어깨를 스칠 것이다. 그 반복이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반복 하나하나가 이 골목을 여전히 살아 있게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를 지내던 자리였다는 옛 이름의 뜻을 다시 떠올려 본다. 이 골목이 지금도 아침마다 무언가를 비는 자리라면, 그 비는 마음은 아마 풍년이 아니라 내일도 이 냄새가 여기 그대로 있어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