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객리단길) 객사 뒤에, 경리단이라는 이름을 빌려 붙였다
조선의 사신이 묵던 집 뒤편 골목이, 서울의 한 동네 이름을 빌려 쓰며 전주에서 가장 젊은 거리가 되었다. 재개발로 묶여 있던 10년이 풀리자, 비어 있던 이 길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다른 얼굴을 갖게 됐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전주 객리단길

밤이 되면 전주객사 뒤편 골목에 조명이 켜진다. 간판마다 다른 색의 빛이 섞이고, 목조 외관의 수제맥주 가게 앞에는 오토바이 한 대가 세워져 있다. 골목 안쪽으로 조금 더 걸으면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밤이 되면 각지의 여행자들이 이 거리로 모여들고, 그 모습이 마치 순례길 같다 하여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골목은 그렇게, 낮과는 다른 얼굴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거리의 이름은 두 단어를 이어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 사신이 머물던 객사(客舍), 그리고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 객리단길이라는 이름은 행정동명이 아니라 둘을 합쳐 자생적으로 붙은 별칭이다.

객사는 아무 건물이나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전주객사의 정식 이름은 풍패지관, 보물 제583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신이 머물거나, 지방 관료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던 자리였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이곳에서 축하 의식을 치렀다.
풍패라는 이름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 이름을 빌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높여 부른 말이다. 임금의 자리를 상징하는 나무패가 이 객사 본관에 걸려 있었다.
비어 있던 10년
지금은 밤마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이 골목도 한때는 정반대였다. 완산구 다가동과 중앙동2가에 걸친 이 일대는 1970~80년대 전주의 유흥가이자 중심 상권이었다. 그러나 1990년 무렵 신시가지로 상권이 옮겨가면서, 이 골목은 인적이 드문 거리가 됐다.

비어 있던 세월은 짧지 않았다. 10여 년간 재개발구역으로 묶여 있던 탓에 새로 들어설 것도, 고쳐 쓸 것도 마땅치 않았다. 낡은 건물들만 그대로 남아 시간을 버텼다.
2016년, 그 지정이 풀렸다. 소자본으로 가게를 열 수 있는 청년 창업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40여 개가 넘는 가게가 들어섰다. 카페, 음료, 빵을 파는 곳들이 먼저였다.
어느 방문자는 이 골목 가게들의 간판이 하나같이 밝고 단순한 톤이라고 적었다. 복고풍 글씨체의 선술집 간판 옆에 미니멀한 로고의 카페가 붙어 있어도 이상하게 어울린다는 인상이다. 10년 넘게 비어 있던 자리에 짧은 시간 가게가 몰려 들어선 흔적이, 지금은 그런 식으로 남아 있다.

가깝지만 다른 길
이 골목은 전주 한옥마을과 걸어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다. 그러나 둘은 같은 자리가 아니다. 한옥마을이 기와지붕과 처마로 채워진 거리라면, 객리단길은 통유리 쇼룸과 간판 불빛으로 채워진 거리다. 가깝지만 전혀 다른 공기를 가진 두 골목이 나란히 있다.
풍패지관의 나무패 앞에서 수백 년간 사람들이 임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 뒷골목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잔을 든다. 예를 올리던 자리와 잔을 부딪히는 자리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 이 골목이 품은 가장 낯선 농담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