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6 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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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동해 묵호 논골담길) 낡은 담장은 그림이 되기로 한 것이다

명태와 오징어를 나르던 지게에서 흘러내린 바닷물이 이 비탈길의 이름을 만들었다. 탄광과 어업이 함께 떠난 뒤, 그 가난한 담장에 2010년 누군가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글
alleymag.
발행
2026.10.13
골목
동해 묵호 논골담길
낡은 담장은 그림이 되기로 한 것이다
Artwork by alleymag.

묵호등대 주차장 쪽에서 좁은 계단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름이다. 논골1길. 바랜 보랏빛 표지판 하나가 길의 번호를 알려준다. 그 아래로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양옆으로는 색을 입은 담장이 끝없이 따라붙는다.

논골이라는 이름은 누가 예쁘게 지어 붙인 것이 아니다. 명태와 오징어를 가득 실은 지게와 고무 대야가 이 비탈을 오르내릴 때마다, 거기서 흘러내린 바닷물이 흙바닥을 적셨다. 마른 날이 드물 만큼 길은 늘 질척거렸고, 그 모습이 꼭 논길 같다 하여 사람들은 이 동네를 논골이라 불렀다. 자랑할 만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저 발이 푹푹 빠지던 가난한 비탈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Artwork by alleymag.

그 가난이 거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묵호항은 1941년,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나르는 작은 항구로 문을 열었다. 1963년에는 묵호등대가 처음 불을 밝혔고, 1964년에는 국제항으로 승격했다. 1968년에는 쌍용양회 시멘트 공장까지 들어서면서, 1960~70년대의 묵호는 석탄과 오징어와 뱃사람들로 불꽃처럼 호황을 누렸다. 그 호황을 떠받친 손들이 비탈 위 논골에 모여 살았다.

영원할 것 같던 불빛도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동해항이 국제무역항으로 떠오르면서 묵호항은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탄광 산업마저 함께 쇠퇴하자 한때 불야성이던 이 동네는 긴 침체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자리에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빛바랜 담장만 남았다.

그 담장을 지우지 않고 그림으로 채우기로 한 것은 2010년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연합회가 함께한 '논골담길 프로젝트'를 통해, 평생 바다와 함께 산 마을 사람들의 삶이 슬레이트 담벼락 위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지게를 진 어부, 명태를 손질하는 아낙, 파도치는 배. 누군가 지어낸 예쁜 그림이 아니라, 이 골목에 실제로 살던 사람들의 하루였다.

Artwork by alleymag.

2015년에는 '도시관광 활성화 공모사업'을 통해 벽화가 한 번 더 전면 보수됐다. 색이 바래면 다시 칠하고, 금이 가면 다시 메웠다. 담장을 고쳐 쓰는 마음은 매번 같았다. 지우지 않고, 덧입히는 것.

지금의 논골담길은 논골1길과 논골2길, 논골3길, 그리고 등대오름길까지 네 갈래 길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등대오름길은 바다 조망이 가장 뛰어나 많은 사람이 오징어잡이 배와 오징어 지게를 그린 트릭아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어느 길로 들어서든 결국 비슷한 풍경과 마주친다. 산비탈을 따라 옹기종기 붙어 앉은 지붕들, 그 지붕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바다.

Artwork by alleymag.

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면 알게 된다. 이 길이 가파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평평한 땅이 귀했던 어촌 마을은 산을 깎아 집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고, 그 집들을 잇는 길은 계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가파름이 사진에 담기 좋은 각도가 되었지만, 한때는 지게를 진 사람들의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고단한 오르막이었다.

묵호역을 거쳐 가는 KTX가 다니기 시작한 뒤로 이 골목을 찾는 걸음은 눈에 띄게 늘었다. 2025년 묵호역 승하차 인원은 42만 7206명으로, 전년보다 11만 명 넘게 늘었다. 월평균 이용객은 약 35% 증가했다. 가난을 가리지 않고 색을 입힌 담장이, 이제는 역에서 내린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 비탈 꼭대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질척거리던 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간직한 채로, 논골담길은 지금도 매일 그 이름의 무게를 딛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맞는다. 그 담장에 그려진 건 결국 그림이 아니라, 떠나지 않고 이 비탈에 남았던 삶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FIELD PHOTOS : 현장에서 모은 사진
dica1234가 담은 논골1길 입구입니다. 바랜 보랏빛 표지판과 가파른 돌계단, 그리고 묵호등대·바람의언덕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이 이 골목의 첫인상을 보여줍니다.dica1234가 담은 논골1길 입구입니다. 바랜 보랏빛 표지판과 가파른 돌계단, 그리고 묵호등대·바람의언덕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이 이 골목의 첫인상을 보여줍니다.
▲ 강원 동해시 논골1길 일대 · 2026.10 / 사진 dica1234 · https://blog.naver.com/dica1234/224427698882 dica1234가 담은 논골1길 입구입니다. 바랜 보랏빛 표지판과 가파른 돌계단, 그리고 묵호등대·바람의언덕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이 이 골목의 첫인상을 보여줍니다.
wltn981213과 konari33이 각각 담은 벽화입니다. 지게에 명태를 매달아 나르는 어부, 혼례를 농담 삼아 주고받는 말풍선 속 마을 사람들.wltn981213과 konari33이 각각 담은 벽화입니다. 지게에 명태를 매달아 나르는 어부, 혼례를 농담 삼아 주고받는 말풍선 속 마을 사람들.
▲ 강원 동해시 논골1길 일대 · 2026.10 / 사진 wltn981213 · konari33 · https://blog.naver.com/wltn981213/224433501281 / https://blog.naver.com/konari33/224421576060 wltn981213과 konari33이 각각 담은 벽화입니다. 지게에 명태를 매달아 나르는 어부, 혼례를 농담 삼아 주고받는 말풍선 속 마을 사람들. 명태잡이로 번성했던 시절 논골 사람들의 하루가 담장 위에 그대로 옮겨져 있습니다.
ykimglow와 wltn981213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본 논골 마을입니다. 산비탈을 따라 파란 지붕과 빨간 지붕이 촘촘히 붙어 앉은 풍경에서,ykimglow와 wltn981213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본 논골 마을입니다. 산비탈을 따라 파란 지붕과 빨간 지붕이 촘촘히 붙어 앉은 풍경에서,
▲ 강원 동해시 묵호진동 일대 · 2026.09 / 사진 ykimglow · wltn981213 · https://blog.naver.com/ykimglow/224418734985 / https://blog.naver.com/wltn981213/224433501281 ykimglow와 wltn981213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본 논골 마을입니다. 산비탈을 따라 파란 지붕과 빨간 지붕이 촘촘히 붙어 앉은 풍경에서, 이 동네가 평평한 땅이 아니라 경사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묵호항의 개항·호황·쇠퇴 연도와 논골담길 벽화 조성 시기, 묵호역 이용객 집계는 웹 검색으로 확인한 공개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골목 풍경 묘사는 2026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올라온 네이버 블로그 방문 기록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발행 이후 새로 확인되는 사실이 있으면 내용을 갱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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