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묵호 논골담길) 오르막이 끝나는 자리에 바다가 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턱까지 차오르는 숨과, 꼭대기에서 마주치는 윤슬 사이. 그 사이 어딘가에 이 골목의 진짜 얼굴이 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13
- 골목
- 동해 묵호 논골담길

묵호등대 주차장 쪽에서 첫 계단에 발을 올리면 아직은 모른다. 이 길이 얼마나 많은 숨을 요구할지. 돌계단은 낮아 보이지만 숫자가 많고, 중간중간 바닥이 고르지 않은 구간도 섞여 있다. 몇 걸음 오르지 않아 이마에 땀이 맺힌다.
계단 옆 담장마다 벽화가 있다. 지게를 진 어부, 명태를 손질하는 아낙, 파도치는 배. 걸음을 멈추고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림마다 말풍선이 달려 있다. 눈꼴 영식이 어제 세장가 간다느니, 새창가 둔다느니. 오래전 이 골목에 살았을 누군가들의 농담이 벽에 박제돼 있다. 지나치지 않고 하나씩 읽다 보면 어느새 숨이 다시 가빠온다.

돌담 틈에는 작은 돌들에 얼굴이 그려져 있다.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눈이 휘둥그레진 얼굴. 누가 언제 그려 넣었는지 알 수 없는 그 돌들이 계단 한쪽에서 조용히 표정을 짓고 있다. 큰 그림들 사이에서 쉽게 지나칠 법한 자리인데, 한 번 발견하면 다음 계단에서도 자꾸 돌담을 흘깃거리게 된다.
오르막이 길게 이어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좁은 골목 사이로 가려져 있던 바다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이다. 여름이라면 햇빛에 반사된 윤슬이 몽글몽글 반짝이고, 가을이라면 조금 선선해진 바람과 조금 옅어진 햇빛이 걸음을 느긋하게 만든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턱까지 차오르던 숨이 그 순간만큼은 잠시 멎는다.

꼭대기 근처에는 사람이 모이는 자리가 있다.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커피 한 잔, 도넛 하나를 들고 앉은 사람들. 주문은 한 건물에서 하고 먹는 자리는 다른 건물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을 만큼 좁은 공간에, 그래도 사람들은 굳이 그 자리를 지킨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 하나를 얻으려고 한참을 서서 기다렸다는 말도 낯설지 않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골목의 소리가 바뀐다. 낮 동안 사진 찍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채워졌던 자리에, 저녁이 되면 전 부치는 기름 소리와 막걸리 주전자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든다. 파전 냄새가 골목 끝까지 퍼지고, 그 냄새에 이끌려 들어선 자리에서는 노릇하게 구운 파전과 잔막걸리가 나온다. 바삭한 파전 한 입, 시원한 막걸리 한 모금. 계단을 오른 보람이 비로소 몸 안쪽에서부터 채워진다.

더 어두워지면 산비탈의 집들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외항선이 묵호항에 들어오던 밤이면 이 산비탈 판잣집들의 불빛이 고층 빌딩처럼 보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이 불빛들은 그때처럼 가난을 밝히는 불이 아니라,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의 와인잔을 비추는 불빛이다. 같은 비탈, 같은 불빛인데 그 빛이 가리키는 삶은 매번 다르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길, 숨은 더는 가쁘지 않다. 대신 발끝이 조심스러워진다.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내려가는 길에는 자꾸 눈에 밟힌다. 빨래가 걸린 창, 화분이 놓인 난간, 불 꺼진 집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두 켤레. 논골담길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던 질척거림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비탈에 기대어 살아온 삶의 흔적은 여전히 계단마다 고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