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6 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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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스팟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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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대구 진골목) 양반을 피해 걷던 길이었다

대구 한복판,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시간이 흐르는 좁은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의 이름은 그저 '길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이름 안에 가장 부유했던 집안과 가장 가난했던 걸음이 함께 들어 있다.

글
alleymag.
발행
2026.10.05
골목
대구 진골목
양반을 피해 걷던 길이었다
Artwork by alleymag.

진골목이라는 이름은 특별할 것이 없다. 경상도 사투리로 '길다'를 '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 뜻을 풀면 그냥 긴 골목이라는 말이다. 번듯한 한자도, 그럴듯한 유래담도 없이, 걷는 사람이 느낀 그대로가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길이 길다는 사실 하나가, 조선시대에는 신분을 가르는 선이 되었다. 지금의 종로 큰길은 그 시절 경상감영으로 통하는 군사·행정로였다. 양반들은 그 큰길을 따라 감영을 드나들었고, 그 길에서 양반과 마주치기를 꺼리던 백성들은 한 블록 안쪽의 이 좁고 긴 길로 돌아다녔다. 같은 목적지, 다른 걸음. 그 갈림이 지금 이 골목의 처음이다.

그렇게 뒷길로 쓰이던 골목이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가장 부유한 이들의 동네가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해방 전까지 이 일대는 대구의 토착 세력이던 달성서씨 집성촌이었고, 1900년대 초반에는 대구 제일의 부자로 꼽히던 서병국의 저택이 이 골목 한 켠을 널찍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대구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그 저택 부지였다고 전한다.

Artwork by alleymag.

부자의 길, 화교의 길

서병국 한 사람의 이름만으로 이 골목을 설명할 수는 없다. 19세기 말부터 화교들이 이 일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대구 최초의 가구점들도 이 골목에서 문을 열었다. 피하던 길이 부자의 길이 되고, 다시 타향에서 건너온 이들의 생업 터가 되는 동안, 골목의 폭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지금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으로 쓰이고 있는 한옥도 그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병국의 사촌인 서우순이 지은 집이다. 기와를 그대로 얹고 창살 문을 그대로 둔 채, 안에서는 커피 기계가 돌아간다. 1930년대에는 이런 근대 건축물이 골목 곳곳에 더 늘어났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정소아과의 담장과 간판도 그 시절의 흔적 가운데 하나다.

Artwork by alleymag.

요정 서른 곳, 기생 오백 명

부자와 화교의 시대 다음은 유흥의 시대였다. 1970년대까지 이 골목에는 요정이 약 서른 곳, 그곳에서 일하던 기생이 오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길다란 이름 그대로, 좁고 긴 골목 하나에 그만큼 많은 밤이 포개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 숫자를 요즘 식으로 옮기면 이렇다. 지금 이 골목에서 커피를 내리고 반찬을 담는 사람 수보다, 그때 이 골목에서 밤을 밝히던 사람 수가 더 많았다.

그 시절의 번화함은 길게 가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 골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방도로 두 개가 새로 뚫리면서 원래 하나로 길게 이어졌던 골목이 끊겼다. 길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의 진골목은 몇 갈래로 나뉜 채 남아 있다. 이름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데 몸은 그 과거의 모양을 다 잃은 셈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

2006년, 대구 중구는 '근대문화공간디자인개선사업'에 선정되어 국비를 지원받았다. 그렇게 근대골목 다섯 개 코스가 만들어졌고, '대구골목투어'라는 이름으로 상표까지 등록되었다. 진골목은 그중 2코스에 속한다.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계산성당과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과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지나 이 골목에 닿고, 다시 대구화교협회로 이어지는 코스다.

Artwork by alleymag.

그 코스 위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것은 건물이 아니라 다방 하나다. 진골목의 명물로 불리는 미도다방, 그 간판은 1928년부터 있었다고 전해지고, 지금의 운영자는 1982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와 약차를 내는 이 다방은 화가 이인성과 소설가 김원일 같은 이들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양반을 피해 걷던 길이, 가장 부유한 이들의 집이 되었다가, 밤이 가장 긴 유흥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쌍화차 한 잔의 다방으로 남았다. 길은 그대로 긴데, 그 길 위를 걷는 이유만 몇 번이나 바뀌었다.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피해서, 혹은 무엇을 찾아서 이 좁은 길로 들어섰는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FIELD PHOTOS : 현장에서 모은 사진
SCENE 01 : 큰길에서 한 걸음
대구 중구청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담은 골목 안쪽 풍경이다. 낮은 한옥 처마 아래로 벽돌담이 이어지고, 그 담에는 골목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대구 중구청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담은 골목 안쪽 풍경이다. 낮은 한옥 처마 아래로 벽돌담이 이어지고, 그 담에는 골목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 대구 중구 종로2가 · 2026.09 / 사진 dgjunggu · https://blog.naver.com/dgjunggu/224416066129 대구 중구청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담은 골목 안쪽 풍경이다. 낮은 한옥 처마 아래로 벽돌담이 이어지고, 그 담에는 골목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큰길에서 몇 걸음 들어왔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진다.
SCENE 02 : 백 년 전 지은 집, 오늘의 창
진골목 한가운데 서 있는 한옥, 지금의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이다. 기와지붕과 창살문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커피가 내려진다.진골목 한가운데 서 있는 한옥, 지금의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이다. 기와지붕과 창살문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커피가 내려진다.
▲ 대구 중구 중앙대로77길 22 · 2026.09 / 사진 sunonelove88 · bangbanggokgok_ · https://blog.naver.com/sunonelove88/224423479852 / https://blog.naver.com/bangbanggokgok_/224387678386 진골목 한가운데 서 있는 한옥, 지금의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이다. 기와지붕과 창살문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커피가 내려진다. 한 블로거는 대구에 살면서도 스무 번 넘게 이 앞을 지났다고 적었고, 다른 블로거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야 보이는 각도에서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말을 남겼다.
SCENE 03 : 끊어진 골목의 담장
정소아과의원의 담장과 세로 간판. 담쟁이와 소나무가 담을 덮어가고 있다. 1930년대 근대 건축이 늘어나던 시절의 흔적이 지금도 병원 간판 하나로 남아 있다.정소아과의원의 담장과 세로 간판. 담쟁이와 소나무가 담을 덮어가고 있다. 1930년대 근대 건축이 늘어나던 시절의 흔적이 지금도 병원 간판 하나로 남아 있다.
▲ 대구 중구 종로2가 · 2026.09 / 사진 dgjunggu · https://blog.naver.com/dgjunggu/224416066129 정소아과의원의 담장과 세로 간판. 담쟁이와 소나무가 담을 덮어가고 있다. 1930년대 근대 건축이 늘어나던 시절의 흔적이 지금도 병원 간판 하나로 남아 있다. 골목 다른 편 담장에는 전통 행렬을 그린 타일 벽화가 붙어 있어, 끊긴 골목이라도 걸을 만한 결을 여전히 쥐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진골목의 명칭 유래, 달성서씨 집성촌, 서병국 일가와 화교 정착, 1930년대 근대 건축, 1970년대 요정·기생과 소방도로 개설, 2006년 근대골목 조성사업 등은 대구역사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대구 중구)과 서울신문 [도시와 길] 대구 진골목(2010.02.22) 기사를 바탕으로 확인했다.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 한옥(1919년 서우순 신축)과 화교소학교·화교협회 터(옛 서병국 저택 부지)에 대한 서술은 현장 안내문을 인용한 방문 기록으로 확인했다. 미도다방의 간판 연원(1928년)과 현 운영자의 인수 시점(1982년)은 방문 기록에 인용된 현지 안내 문구를 따른 것으로, 진골목 안으로 옮긴 정확한 시점은 자료마다 달라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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