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진골목) 양반을 피해 걷던 길이었다
대구 한복판,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시간이 흐르는 좁은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의 이름은 그저 '길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이름 안에 가장 부유했던 집안과 가장 가난했던 걸음이 함께 들어 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대구 진골목

진골목이라는 이름은 특별할 것이 없다. 경상도 사투리로 '길다'를 '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 뜻을 풀면 그냥 긴 골목이라는 말이다. 번듯한 한자도, 그럴듯한 유래담도 없이, 걷는 사람이 느낀 그대로가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길이 길다는 사실 하나가, 조선시대에는 신분을 가르는 선이 되었다. 지금의 종로 큰길은 그 시절 경상감영으로 통하는 군사·행정로였다. 양반들은 그 큰길을 따라 감영을 드나들었고, 그 길에서 양반과 마주치기를 꺼리던 백성들은 한 블록 안쪽의 이 좁고 긴 길로 돌아다녔다. 같은 목적지, 다른 걸음. 그 갈림이 지금 이 골목의 처음이다.
그렇게 뒷길로 쓰이던 골목이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가장 부유한 이들의 동네가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해방 전까지 이 일대는 대구의 토착 세력이던 달성서씨 집성촌이었고, 1900년대 초반에는 대구 제일의 부자로 꼽히던 서병국의 저택이 이 골목 한 켠을 널찍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대구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그 저택 부지였다고 전한다.

부자의 길, 화교의 길
서병국 한 사람의 이름만으로 이 골목을 설명할 수는 없다. 19세기 말부터 화교들이 이 일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대구 최초의 가구점들도 이 골목에서 문을 열었다. 피하던 길이 부자의 길이 되고, 다시 타향에서 건너온 이들의 생업 터가 되는 동안, 골목의 폭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지금 스타벅스 대구종로고택점으로 쓰이고 있는 한옥도 그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병국의 사촌인 서우순이 지은 집이다. 기와를 그대로 얹고 창살 문을 그대로 둔 채, 안에서는 커피 기계가 돌아간다. 1930년대에는 이런 근대 건축물이 골목 곳곳에 더 늘어났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정소아과의 담장과 간판도 그 시절의 흔적 가운데 하나다.

요정 서른 곳, 기생 오백 명
부자와 화교의 시대 다음은 유흥의 시대였다. 1970년대까지 이 골목에는 요정이 약 서른 곳, 그곳에서 일하던 기생이 오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길다란 이름 그대로, 좁고 긴 골목 하나에 그만큼 많은 밤이 포개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 숫자를 요즘 식으로 옮기면 이렇다. 지금 이 골목에서 커피를 내리고 반찬을 담는 사람 수보다, 그때 이 골목에서 밤을 밝히던 사람 수가 더 많았다.
그 시절의 번화함은 길게 가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 골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방도로 두 개가 새로 뚫리면서 원래 하나로 길게 이어졌던 골목이 끊겼다. 길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의 진골목은 몇 갈래로 나뉜 채 남아 있다. 이름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데 몸은 그 과거의 모양을 다 잃은 셈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
2006년, 대구 중구는 '근대문화공간디자인개선사업'에 선정되어 국비를 지원받았다. 그렇게 근대골목 다섯 개 코스가 만들어졌고, '대구골목투어'라는 이름으로 상표까지 등록되었다. 진골목은 그중 2코스에 속한다.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계산성당과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과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지나 이 골목에 닿고, 다시 대구화교협회로 이어지는 코스다.

그 코스 위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것은 건물이 아니라 다방 하나다. 진골목의 명물로 불리는 미도다방, 그 간판은 1928년부터 있었다고 전해지고, 지금의 운영자는 1982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와 약차를 내는 이 다방은 화가 이인성과 소설가 김원일 같은 이들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양반을 피해 걷던 길이, 가장 부유한 이들의 집이 되었다가, 밤이 가장 긴 유흥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쌍화차 한 잔의 다방으로 남았다. 길은 그대로 긴데, 그 길 위를 걷는 이유만 몇 번이나 바뀌었다.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피해서, 혹은 무엇을 찾아서 이 좁은 길로 들어섰는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