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골목을 온전히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그 안의 모든 서사를 단 한 편의 에세이로 엮어내는 메인 콘텐츠입니다.
시장은 이름을 세 번 바꾸고 한 번 불에 탔다. 그러고도 입구에 걸린 그 숫자만은 지우지 않았다.
청주읍성은 백 년도 더 전에 헐렸다. 그런데 이 거리는 여전히 성 안쪽 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울산 최초의 기차역이 있던 이 자리는 산업도시의 스물 몇 살들이 밤늦도록 서성이던 골목이 됐고, '젊음의거리'라는 이름은 지금도 그대
밀물 때 배를 대던 다리는 이제 없다. 그런데 이 골목은 여전히, 무언가를 건너게 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통영 중앙시장 뒷산의 낡은 동네는 한때 지도 위에서 지워질 계획이었다. 그 언덕을 지킨 것은 행정이 아니라 벽에 칠해진 물감이었다.
목포 오거리 언덕을 걷다 보면 자꾸 옛 문패와 마주친다. 영사관이었다가 시청이 되고, 은행이었다가 음악당이 된 건물들이 이 골목의 뼈
여수 낭만포차거리에는 오래된 유래담이 없다. 있는 것은 2012년의 노래 한 곡과, 다리 밑으로 옮겨 앉은 2019년의 결정이다.
가수는 다섯 살에 이 골목을 떠났지만, 골목은 서른 해도 더 지나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신포(新浦), 새롭게 번창하는 포구라는 뜻이다. 개항과 함께 지어진 이 이름은 백 년 넘게 이 동네가 스스로를 고쳐 부르는 방식이 되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은 이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태원의 골목에서 건너온 이름이 신라 고분 곁에 내려앉기까지, 이 골목이 밟아 온
전주 한옥마을은 전통이 오래 쌓여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성벽이 뜯겨나간 자리에서, 사람들이 맞서기 위해 택한 방식이 한옥이었다.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시절, 사거리 노점에서 시작된 자리가 칠십 년을 건너 스무 몇 개의 간판으로 남았다.
명주라는 이름은 천 년 가까이 강릉을 대표하던 행정의 중심이었다. 시청이 떠나고 골목이 빛바랜 뒤, 이 자리를 다시 채운 것은 낡은
군산항이 문을 연 순간부터 이 동네의 주인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그 시절 세워진 건물들만 남아 지금 거리의 얼굴이 되어 있다.
대전역 뒤편, 철도 노동자들이 살던 사택은 부서지는 대신 남는 쪽을 택했다. 백 년을 버틴 지붕 아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다른 시
방산이라는 두 글자에는 반어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 반어가 시작된 자리는 과자에서 인쇄로, 인쇄에서 포장재로, 업종을 세 번 넘게
한때 해 질 녘이면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이라 불렸다. 이제 그 시장은 다른 동네에서 다른 이름을 걸고 있다.
1969년부터 이 자리에 있던 부대의 이름이, 부대가 사라진 뒤에도 골목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 이름을 딛고 자란 골목은 한 번은 넘
압구정 로데오라는 이름은 이 골목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태평양 건너 거리의 이름을 빌려 붙인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절을
군사가 주둔하던 성 밖 벌판은 대사관과 요정과 문인의 시간을 차례로 통과하며, 서울에서 담장이 가장 높은 동네가 되었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프로방스마을은 한 걸음 차이로 닿아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시간대를 품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진
송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도 이 골목엔 이미 저녁이 있었다. 그 이름이 자리를 잡은 뒤로는, 호수와 타워가 함께 보이는 자리마다
광교신도시는 처음부터 호수공원을 계획했다. 어떤 건물의 주차장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거닐 쉼터를 만들었고, 그 물가에 카페 상권이 자
조선시대부터 이씨 집성촌으로 알려졌던 동편마을이 반세기 만에 택지 단지로, 그리고 카페거리로 변모했다. 이 골목의 지명처럼, 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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