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성 밖에 가장 높은 담장이 선 것이다
군사가 주둔하던 성 밖 벌판은 대사관과 요정과 문인의 시간을 차례로 통과하며, 서울에서 담장이 가장 높은 동네가 되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14
- 골목
- 성북동

성북동이라는 이름은 누군가 성을 지키려고 이 자리에 진을 친 데서 시작됐다. 조선 영조 41년, 그러니까 1765년에 도성을 수비하던 어영청이 이 자리에 북쪽 주둔지인 북둔을 두면서 동네는 처음으로 이름을 얻었다.
행정동으로서 성북동이라는 이름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군사들이 진을 치던 자리가 하나의 동네로 다시 태어나는 데 백 년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어영청은 도성을 지키던 여러 군영 가운데 하나였고, 북둔은 그 가운데서도 도성 북쪽을 맡은 부대가 머물던 자리였다. 군인이 빠져나간 자리에 이름만 남았고, 그 이름이 오늘의 성북동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곧장 번화한 동네가 된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성북동은 한적한 교외였다. 옛 양반들이 별장을 짓고 과수원과 밭을 일구던 자리였고, 도심에서 벗어나 잠시 쉬러 오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정도였다. 지금 성북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던 동네였을 것이다.

문인들이 먼저 들어와 앉았다
이 조용한 동네에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이태준은 1933년부터 성북동 수연산방에 거처를 정하고 창작에 몰두했다. 그의 단편 '달밤'은 이 동네를 배경으로 쓰였다. 정지용과 이육사 같은 근현대 문인들도 이 골목 어딘가에 세를 얻어 머물렀다. 시인과 소설가가 나란히 이 언덕을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성북동이 처음부터 그저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니라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동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술품을 모으던 이들도 비슷한 시기에 이 동네를 골랐다. 1938년,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보화각이 성북동에 세워졌다. 수집가 전형필이 평생 모은 것들을 갈무리해둔 자리였다. 1966년에는 이 보화각이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국보 70호 훈민정음을 비롯한 유물들이 지금도 그 안에 있다. 좁은 골목 안에 국보급 유물이 있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그저 조용한 주택가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문화의 자리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성 밖 벌판이 부촌이 되기까지
성북동이 처음부터 부유한 동네였다고 말하면 순서가 틀린다. 일제강점기까지 이곳은 시골에 가까웠고, 본격적인 개발은 1960년대에야 시작됐다. 삼청터널과 북악산길이 뚫리면서 도심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그때부터 동네의 얼굴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21 사태였다. 청와대를 노린 침입 사건 이후 북한산 쪽 길목을 지키고 살필 필요가 커지면서, 여러 나라의 대사관이 이 일대로 자리를 옮겨 왔다. 대사관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담장이 늘어난다는 뜻이었고, 그 담장들이 성북동을 고급 주택가로 굳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북동은 서울의 전통적인 부촌 1번지로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성북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낮은 처마 옆으로 높은 담장이 이어진다. 중국대사관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대사관저가 이 동네에 모여 있고, 그 담장 안쪽은 걸어서는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다.
이 담장들은 나라마다 색과 높이가 다르다. 어떤 담장은 낮고 가지런하고, 어떤 담장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담장 안쪽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다. 성북동을 부촌으로 만든 것은 결국 이 보이지 않는 안쪽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정이 절이 된 자리
이 동네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은 아마 길상사일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 있었다. 그 집을 절로 고쳐 1997년 12월, 길상사가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담은 도량으로 알려지며, 화려하던 자리는 비우는 마음을 가르치는 자리로 바뀌었다.
화려한 요정에서 무소유를 말하는 절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성북동이라는 동네를 이해하는 데 뜻밖의 실마리가 된다. 가장 많이 가진 것들이 모이던 자리에서, 가장 적게 가지자는 말이 나온 셈이다. 이 동네의 부유함과 이 동네의 비움이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길상사를 그저 하나의 사찰 이상으로 만든다.
성 밖에 진을 치던 군사도, 별장을 짓던 양반도, 세를 얻어 글을 쓰던 문인도, 담장을 올린 대사관도, 가진 것을 내려놓은 스님도 결국 같은 골목을 지나갔다. 성북동이라는 이름이 처음 생겼을 때 이 자리는 성 밖의 벌판이었다.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사람은 그 벌판이 서울에서 담장이 가장 높은 동네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쳐 갔는지, 다음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삼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담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될지는, 걷는 사람만이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