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담장 너머로 지는 해
대사관 담장이 이어지는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면, 해가 지는 시간 옥상 너머로 성북동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2.11
- 골목
- 성북동

성북동은 초입부터 오르막이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드는 순간 발끝에 경사가 걸리고,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진다. 이 골목을 처음 걷는 사람도, 여러 번 걸은 사람도 그 경사만큼은 매번 새로 느낀다.
아침의 사찰, 낮의 골목
이른 아침 이 골목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한 방향으로 향한다. 길상사로 오르는 계단이다.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서면 숲으로 둘러싸인 전각이 나타나고, 나무 냄새와 이른 볕이 동시에 얼굴에 닿는다. 아직 관광버스도, 사진을 찍으려는 줄도 없는 시간이다. 처마 끝 단청이 아직 그늘에 덮여 있어 색이 낮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보인다.
이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이도, 전각 마루에 잠시 앉았다 일어서는 이도, 서로 말을 걸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지나간다. 산책이라기보다는 잠깐의 정돈에 가까운 걸음이다.

낮이 되면 걸음은 다시 골목 쪽으로 향한다. 고요하고 아늑한 길이 이어진다. 덕수유치원을 지나 산책길 언덕을 따라 걷다 보면, 차분한 분위기를 더해주는 레트로한 건물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낡은 벽돌과 오래된 창틀이 지나는 사람의 걸음을 붙잡는다. 어느 집 담장 위로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늘어뜨리고 있어, 그 그늘만 따라 걸어도 한낮의 볕을 피할 수 있다.
레트로한 건물 앞에서는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자주 걸음을 멈춘다. 골목 구석구석을 그렇게 조금씩 담아가는 이들에게 성북동은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동네로 남는다.
골목이 가장 좁아지는 지점에서는 차 한 대가 지나가면 사람은 잠시 담장에 붙어 서야 한다. 그 몇 초의 정지가 성북동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오르막과 좁은 길이 원래 이 동네의 생김새이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면 옥상이 열린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의 걸음이 조금 더 들뜬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골목을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건물은 이층에 주방과 바를, 삼층에 넓은 홀을, 사층에 옥상을 두고 손님을 위로, 위로 올려보낸다. 계단을 오를수록 아래층의 말소리는 멀어지고, 대신 저녁 바람 소리가 가까워진다.

해가 질 무렵 옥상에 올라서면 성북동 동네 풍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서울 한복판인데도 마음이 한결 느긋해진다고, 다녀간 이들은 적어둔다. 낮 동안 오르던 오르막이, 저녁에는 눈앞의 풍경으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지붕과 지붕 사이로 하나둘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 많은 지붕 아래 저마다 다른 저녁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가을이 섞이는 저녁 공기
구월의 성북동에는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함께 섞여 있다. 낮에는 아직 볕이 따갑다가도 해가 기울면 금세 서늘해진다. 옥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겉옷을 걸치는 시간이 그 경계를 알려준다.
꽃무릇이 피기 시작하면 길상사 마당을 붉게 물들인다는 이야기를, 이 골목을 다녀간 사람들은 자주 적어둔다. 아침에 숲 냄새를 맡으며 오르던 계단이 가을이 되면 붉은 꽃 사이로 오르는 계단이 된다. 바람이 불면 골목 어딘가에서 마른 잎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여름 내내 들리던 소리 사이로 그 소리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하면 성북동도 가을을 맞이한 것이다. 그 소리를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알아챈 사람은 꼭 걸음을 한 번 멈춘다.

밤이 되면 담장이 더 잘 보인다
이 시간이 되면 낮 동안 붐비던 카페 거리도 하나둘 불을 끈다. 노포의 셔터도 내려가고, 남은 것은 대사관저의 창에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 몇 개뿐이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연등과 처마 그림자가 골목 곳곳에 남는다. 가로수 옆 화단은 낮보다 조용해지고, 지나는 사람들의 발소리만 또렷해진다. 대사관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낮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담장의 높이가 그제야 실감 난다. 담장 위로 삐져나온 나뭇가지만이 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려줄 뿐이다.
하루 안에서 성북동은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꾼다. 이른 아침의 숲과 낮의 오르막, 저녁의 옥상과 밤의 담장이 같은 골목 위에 겹쳐 있다. 이 골목을 스마트폰을 들고 구석구석 여행하는 사람들도, 결국 자신이 걸은 시간의 얼굴 하나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다시 이 오르막을 오를 때는, 또 다른 얼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