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6 MON
스팟 데이터베이스 555 ABOUT
alleymag. 골목을 걷고, 재고,
기록하는 로컬 아카이브
기록한 골목92
발행 아티클2192
등록 스팟555
실측 업소0
기록 시작2026.09

(압구정 로데오거리) 빌려온 이름으로 삼십 년

압구정 로데오라는 이름은 이 골목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태평양 건너 거리의 이름을 빌려 붙인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절을 살아냈다.

글
alleymag.
발행
2026.01.14
골목
압구정 로데오거리
빌려온 이름으로 삼십 년
Artwork by alleymag.

압구정 로데오라는 이름은 이 골목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1990년, 누군가 태평양 건너 미국 베벌리힐스의 거리 하나를 이 골목에 겹쳐 놓았다. 로데오 드라이브. 그 이름을 그대로 옮겨 붙였다. 이 거리는 처음부터 다른 곳의 이름을 빌려 출발한 셈이다.

이름을 빌려올 자격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명동에서 옷을 짓던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압구정동으로 자리를 옮겨 왔고, 그들을 따라 의상실이 들어섰다. 모델을 키우는 곳과 머리를 만지는 곳, 피부를 관리하는 곳과 살을 빼주는 곳이 차례로 문을 열면서, 상류사회의 소비가 여러 동네를 떠돌지 않고 이 골목 하나에 모이기 시작했다. 명동에서 가위질하던 손들이 압구정동에 다시 작업대를 놓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초, 이 거리는 패션의 중심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렌지족'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었다. 부유한 집 자제들이 외제차를 몰고 이 골목에 모여 해외에서 들여온 명품 옷을 사들이던 시절이었다. 차가 서고 사람이 내리고 쇼핑백이 늘어나는 풍경이 거의 매일 되풀이되었다.

Artwork by alleymag.

그 시절 이 거리를 채운 것은 옷만이 아니었다. 의상실 옆에 미용실이 붙었고, 미용실 옆에 피부 관리실이 붙었다. 몸을 가꾸고 얼굴을 다듬고 옷을 갖춰 입는 일들이 한 골목 안에서 순서대로 이어졌다. 외제차 한 대가 서면 그 하루의 소비가 이 골목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끝났다. 그만큼 촘촘하게 짜인 거리였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이 골목은 신사동에 속한다. 그런데 이 거리를 부를 때 신사동이라는 이름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압구정 로데오라고 부른다. 서류에 적히는 이름과 사람들 입에 붙은 이름이 서로 다른 채로, 이 골목은 삼십 년 넘게 두 이름을 함께 지고 왔다.

패션 1번지라는 말이 끝나던 자리

2000년대 초까지도 이 거리는 '대한민국 패션 1번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른 수식어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호칭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가로수길이라는 새 이름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고, 이 거리로만 향하던 걸음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Artwork by alleymag.

걸음이 갈라진 이유는 땅 아래 있었다. 땅값이 상권 커지는 속도보다 더 가파르게 올랐고, 세를 내던 이들은 그 속도를 버티기 어려워졌다. 명품 거리라는 이름과 고급 레스토랑, 카페, 상점들은 바로 옆 청담동의 언덕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고,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이들은 가로수길로 떠났다. 그렇게 이 거리는 가진 것을 하나씩 내주며 상권으로서의 힘을 잃어 갔다.

다시 채워지는 방식

비어 가던 이 거리에 다시 발걸음이 돌기 시작한 것은 2020년대 이후다. 도산공원 일대와 손을 잡은 '착한 임대료 사업' 같은 시도들이 상권을 조금씩 되살렸다. 마뗑킴, 위글위글 같은 이름들이 이 거리에 들어왔다. 이번에 거리를 채우는 이들은 오렌지족이 아니라 MZ세대를 겨냥한 브랜드들이다.

임대료가 예전만큼 버겁지 않아진 덕분에, 큰 브랜드부터 작은 브랜드까지 이 거리에 대표 매장을 내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바로 옆 도산공원 인근도 명품 브랜드숍과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세계 각지의 스트리트 패션 매장이 모여드는 자리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한 번 떠났던 패션의 중심지라는 이름이,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온 셈이다.

Artwork by alleymag.

오렌지족이라는 말은 이제 이 거리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 말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중년을 지났고, 그 시절의 외제차와 쇼핑백 대신 지금은 편집숍의 통유리와 팝업스토어의 배너가 거리를 채운다. 부르는 이름은 사라졌어도, 사람이 몰리고 소비가 모이는 자리라는 성격만큼은 삼십 년째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24년 12월, 압구정로데오 상권에는 상가 천서른한 곳이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이 골목에 자리 잡은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간판은 삼십몇 년 전 오렌지족을 맞았던 그 자리에서 이름만 바꾸어 걸렸고, 어떤 간판은 이제 막 새로 왔다. 그 사이에서 이 거리는 여전히, 빌려온 이름 아래 자기 얼굴을 바꾸는 중이다.

가로수길로, 청담동으로 흩어졌던 흐름이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도 흐른다. 한때 이 거리를 떠났던 것들이 다시 돌아오고, 그 자리에 전에 없던 이름들이 나란히 선다. 상권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골목은 삼십 년에 걸쳐 두 번 증명한 셈이다.

로데오 드라이브라는 이름을 처음 빌려 붙인 사람은 아마 이 거리가 삼십 년 넘게 이렇게 얼굴을 바꿔 가며 이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빌린 이름 하나가 이토록 오래, 이토록 다른 시절들을 품게 될 줄은.

FIELD PHOTOS : 현장에서 모은 사진
SCENE 01 : 이름이 걸린 자리
압구정 로데오역 인근에 세워진 '압구정 로데오' 조형물과, 그 옆 골목의 화려한 매장 건물입니다. 이 거리의 이름과 지금 얼굴을 함께 보여줍니다.압구정 로데오역 인근에 세워진 '압구정 로데오' 조형물과, 그 옆 골목의 화려한 매장 건물입니다. 이 거리의 이름과 지금 얼굴을 함께 보여줍니다.
▲ 2026.09 / 사진 nicholasnam · https://blog.naver.com/nicholasnam/224403684410 압구정 로데오역 인근에 세워진 '압구정 로데오' 조형물과, 그 옆 골목의 화려한 매장 건물입니다. 이 거리의 이름과 지금 얼굴을 함께 보여줍니다.
SCENE 02 : 새로 걸린 간판
MZ세대를 겨냥한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과, 화려한 조명의 브랜드 스토어입니다. 낮은 임대료 덕분에 새로 들어선 간판들입니다.MZ세대를 겨냥한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과, 화려한 조명의 브랜드 스토어입니다. 낮은 임대료 덕분에 새로 들어선 간판들입니다.
▲ 2026.09 / 사진 nicholasnam · landmarkeye · https://blog.naver.com/nicholasnam/224403684410 / https://blog.naver.com/landmarkeye/224417138636 MZ세대를 겨냥한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과, 화려한 조명의 브랜드 스토어입니다. 낮은 임대료 덕분에 새로 들어선 간판들입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역사와 상권 변화 서술은 서울사랑(love.seoul.go.kr), 디지털강남문화대전(grandculture.net), 한경 비즈니스, KB의 생각, 보그 코리아에서 확인한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상가 수는 2024년 12월 조사된 값이다. 발행 이후 새로 확인되는 방문 기록이 있으면 사진과 내용을 갱신한다.
#압구정로데오거리#강남구#신사동#패션1번지#오렌지족앨리매거진alleymag

바로가기 등록하시면, 더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