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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진주 중앙시장) 간판 위에 걸린 숫자, 1884

시장은 이름을 세 번 바꾸고 한 번 불에 탔다. 그러고도 입구에 걸린 그 숫자만은 지우지 않았다.

글
alleymag.
발행
2026.01.18
골목
진주 중앙시장
간판 위에 걸린 숫자, 1884
Artwork by alleymag.

시장 2층으로 오르는 자리, 안내판 옆에 세워진 배너에 네 자리 숫자가 적혀 있다. 1884. 그 아래로는 영문으로 CENTRAL MARKET JIN JU라는 글자가 나란히 붙는다. 시장이 자기 나이를 이렇게 정면에 내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해, 진주의 상인들은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라는 이름으로 처음 모였다. 처음부터 매일 문을 여는 시장은 아니었다. 매월 2일과 7일, 닷새에 한 번 장이 서는 5일장으로 시작한 자리였다.

닷새의 장에서 매일의 시장으로

5일장이 매일 여는 상설시장으로 바뀐 것은 일제시대 들어서였다. 1937년에는 이름도 바뀌어 '진주시장 진흥회'라 불렸다. 그 이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상인들은 이 이름을 버리고 '중앙시장'이라는 새 이름을 걸었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지금 이 지붕 아래를 걸으면 상설시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좌판마다 사과와 참외가 빨간 대야에 담겨 있고, 그 옆으로 신발가게와 잡화점이 이어진다. 매일 문을 여는 시장이라는 사실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Artwork by alleymag.

머리 위로는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들어간 아치형 유리 지붕이 통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그 아래로 빛이 고르게 떨어져서, 흐린 날에도 시장 안은 어둡지 않다. 굳이 우산을 펼 일이 없는 시장이라는 사실도, 어쩌면 저 지붕을 새로 얹은 재건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진주에는 이 중앙시장과 이웃한 또 다른 전통시장도 있다. 논개시장이다. 두 시장은 걸어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깝지만 엄연히 다른 시장이고, 상인들도 따로 조직돼 있다. 이름이 자주 함께 불리는 것도 그만큼 두 시장이 나란히 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에 타버린 자리에서

이 평온한 풍경 뒤에는 한 번의 큰 사고가 있었다. 1966년 1월, 대화재가 시장을 덮쳐 점포가 모두 불에 탔다. 지금 남아 있는 점포 대부분은 그 뒤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시장을 걷다 마주치는 벽과 지붕은 실은 1966년 이후에 세워진 것들인 셈이다.

화재는 상인들의 조직도 바꿔 놓았다. 이듬해인 1967년, 상인들이 부담금을 모아 '진주중앙공설시장'을 새로 발족시켰다. 1970년에는 민영화 시장법인인 '중앙시장 번영회'가 출범했고, 1971년부터는 그때까지 시 소유였던 시장 부지가 상인 개개인에게 팔리기 시작했다. 공영에서 민영으로 넘어간 그 전환이 지금 이 시장의 뼈대를 만들었다.

Artwork by alleymag.

시장 입구에 걸린 아치형 간판 아래를 지나면, 옷가게와 이불가게, 선풍기와 전기담요를 파는 가게까지 한 골목에 모여 있다.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파는 시장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맛

이 시장의 역사 안에는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맛도 있다. 진주냉면은 조선시대 진주가 양반과 기방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교방을 통해 전해진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까지는 수정, 평화, 은하 같은 식당들이 이 냉면을 팔았다. 그러다 1966년의 그 화재를 기점으로 명맥이 끊겼다.

진주교방 냉면의 원형을 알고 있던 하거홍, 황덕이 부부가 광복 이후 이 중앙시장 안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하면서 냉면은 되살아났다. 그 뒤로 장남인 하연규, 박군자 부부가 가업을 이어 2대에 걸쳐 이 맛을 지키고 있다. 시장이 통째로 타버렸던 그 자리에서, 사라졌던 국수 한 그릇이 다시 살아난 셈이다.

Artwork by alleymag.

지금 이 시장에서 '진주명물'이라는 글자를 내건 가게는 냉면집만이 아니다. 꿀빵을 파는 가게들도 저마다 간판에 그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백 년 넘게 이어진 시장 안에서 무엇을 명물이라 부를지는 가게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인다.

숫자를 지우지 않는 이유

2011년, 이 시장은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됐다. 화재로 다 타버렸던 자리가 반세기 만에 관광객이 찾는 자리가 된 셈이다. 민영화된 지 사십 년 만에, 이번에는 시장 스스로가 아니라 정책이 이 자리를 다시 손보기 시작한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청년 상인들이 운영하는 '비단길'이라는 공간도 새로 생겼다. 시장은 이름을 세 번 바꾸고 주인을 두 번 바꾸고 불에 한 번 타면서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사이 시장을 채운 사람들의 얼굴은 여러 번 바뀌었을 텐데, 자리만은 한 번도 옮겨지지 않았다.

입구에 걸린 저 숫자, 1884는 그래서 단순한 장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다시 세워진 지붕 아래에서도 상인들이 굳이 지우지 않고 걸어 둔 숫자이기 때문이다.

FIELD PHOTOS : 현장에서 모은 사진
SCENE 01 : 지붕 아래 늘어선 과일가게
지붕 덮인 아케이드 통로 아래로 과일가게 좌판이 늘어서 있다. 매일 문을 여는 상설시장의 지금 모습을 보여준다.지붕 덮인 아케이드 통로 아래로 과일가게 좌판이 늘어서 있다. 매일 문을 여는 상설시장의 지금 모습을 보여준다.
▲ 경남 진주시 중앙시장 · 2026.09 / 사진 nailstan · https://blog.naver.com/nailstan/224400006444 지붕 덮인 아케이드 통로 아래로 과일가게 좌판이 늘어서 있다. 매일 문을 여는 상설시장의 지금 모습을 보여준다.
SCENE 02 : 입구의 아치와 생활용품 좌판
진주중앙시장 정문 아치 간판과, 선풍기와 이불 같은 생활용품을 파는 점포. 먹거리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두루 파는 시장의 면모를 보여준다.진주중앙시장 정문 아치 간판과, 선풍기와 이불 같은 생활용품을 파는 점포. 먹거리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두루 파는 시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 경남 진주시 중앙시장 · 2026.09 / 사진 nailstan · https://blog.naver.com/nailstan/224400006444 진주중앙시장 정문 아치 간판과, 선풍기와 이불 같은 생활용품을 파는 점포. 먹거리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두루 파는 시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SCENE 03 : 진주명물이라 적힌 간판
진주명물이라 적힌 덕인당 꿀빵 간판과 포장된 꿀빵. 냉면집 말고도 진주명물을 내세우는 가게들이 시장 곳곳에 있다.진주명물이라 적힌 덕인당 꿀빵 간판과 포장된 꿀빵. 냉면집 말고도 진주명물을 내세우는 가게들이 시장 곳곳에 있다.
▲ 경남 진주시 중앙시장 · 2026.07 / 사진 hyechon49 · https://blog.naver.com/hyechon49/224362011174 진주명물이라 적힌 덕인당 꿀빵 간판과 포장된 꿀빵. 냉면집 말고도 진주명물을 내세우는 가게들이 시장 곳곳에 있다.
이 글의 연도와 역사 서술은 디지털진주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주냉면 관련 언론 보도 등을 2026년 9월 웹 검색으로 확인한 내용을 근거로 했다. 시장 안 풍경은 2026년 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방문 기록에서 확인한 사진과 서술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발행 이후 새로 확인되는 방문 기록이 있으면 사진과 내용을 갱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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