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동피랑벽화마을) 무너뜨리는 대신 칠하기로 했다
통영 중앙시장 뒷산의 낡은 동네는 한때 지도 위에서 지워질 계획이었다. 그 언덕을 지킨 것은 행정이 아니라 벽에 칠해진 물감이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17
- 골목
- 통영 동피랑벽화마을

통영 중앙시장 뒤로 난 오르막을 오르면 낡은 산동네 하나가 나온다. 이 마을은 한때 지도 위에서 지워질 계획이었다.
동피랑이라는 이름부터가 이 마을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말이다. 동쪽을 뜻하는 '동'에 벼랑과 비탈을 가리키는 통영 사투리 '비랑'이 붙었다. 마을이 앉은 언덕 자체가 이름이 된 셈이다.
이 언덕 꼭대기에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가 있었다. 동쪽을 지키던 포루가 서 있던 자리에,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곳이 지금의 동피랑이다.
2000년대 중반, 통영시는 이 낡은 산동네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동포루를 복원해 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오래된 집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 정자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칠하기로 한 사람들
그런데 2007년 10월,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이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헐기 전에 벽에 그림을 그려보자는 것이었다.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벽화공모전'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공모전에 전국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 등 열여덟 팀이 모였고, 낡은 담벼락마다 붓이 지나갔다.
칠이 마르기도 전에 입소문이 났다.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고, 늘어난 발걸음은 이 마을을 두고 보자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결국 통영시는 철거 방침을 접었다. 언덕 꼭대기의 집 세 채만 동포루 복원을 위해 헐렸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았다.

지우려던 마을 전체에서 남은 것은 세 채를 뺀 나머지 전부였다. 벽에 칠한 물감 몇 통이, 행정 계획 하나를 통째로 뒤로 물린 셈이다.
골목 입구에는 마을 전체를 그린 지도 안내판이 서 있다. 어디서부터 걸음을 시작해도 결국 언덕 꼭대기 동포루 근처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길이라, 처음 온 사람도 크게 헤매지 않는다. 안내판 옆으로는 '몽마르다 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샛길도 따로 갈라져 나간다.
지금도 덧그려지는 그림
지금도 동피랑의 벽화는 고정된 그림이 아니다. 공모전과 축제를 통해 낡은 그림 위에 새 그림이 계속 덧그려지고, 골목을 도는 사람들은 지난번과 다른 벽을 마주친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철거를 면한 골목 꼭대기에는 결국 동포루가 복원되어 서 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 마을을 지키던 자리가 지금은 마을을 내려다보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덕을 다 오르면 파란 바다와 크고 작은 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을 헐지 않고 색을 입히기로 한 그 오래된 결정이 지켜낸 것은, 어쩌면 이 풍경을 오르는 걸음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언덕을 오르는 사람 대부분은 이 동네가 한때 통째로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벽화 사진만 찍고 내려간다. 그래도 골목 어딘가에는 그 사연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새로 칠한 벽 옆에, 색이 바래도 지우지 않고 남겨 둔 오래된 벽화 한 자락 같은 것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