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 노점 하나가 골목이 되었다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시절, 사거리 노점에서 시작된 자리가 칠십 년을 건너 스무 몇 개의 간판으로 남았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15
- 골목
-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시절이 있다. 1950년 8월부터 10월까지, 그리고 1951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이 도시에 머물렀다. 전쟁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이 골목마다 몸을 뉘였고,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에는 천막을 두른 피란 학교가 여럿 섰다. 책상도 칠판도 변변치 않은 교실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안에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함경북도에서 피란 내려온 손정린씨 부부가 보수동 사거리 입구에 자리를 잡은 것이 그 무렵이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책과 고물을 늘어놓고 팔기 시작했다. 팔 수 있는 것이 마침 책이었을 뿐,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천막 교실의 학생들에게는 교과서가 필요했다. 새 책을 살 형편이 되는 집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 다 본 교과서를 내놓으면 다른 누군가 그것을 사 갔고, 생계를 위한 노점과 학생들의 교환이 같은 자리에서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거래가 오가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노점으로 시작된 거래는 오래지 않아 좌판을 넘어 상설 점포로 자리를 잡아 갔다. 찾는 사람이 늘고 내놓는 책이 늘면서, 사고파는 자리 하나하나가 지붕을 얻고 간판을 달았다. 사거리 노점 하나로 시작된 일이 골목 전체로 번져 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칠십 개의 간판
19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며 이 골목에는 7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섰다. 전쟁의 기억으로 시작된 자리가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명소로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무렵이다. 80년대에는 점포 수가 100개를 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헌책 한 권을 사기 위해 이 골목을 찾는 일이 당연하던 시절이다.
지금 골목 초입에는 책 더미를 품에 안은 사람의 동상이 서 있다. 돌계단 옆, 책방골목길이라 적힌 표지판 아래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이 골목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말해주는 모양이다.
남은 스무 몇 곳
그 시절의 골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좁은 통로마다 사람이 빽빽했다고 말한다. 지나가려면 어깨를 부딪혀야 했고, 좌판에 놓인 책을 들춰 보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지금 걷는 이 골목의 폭과 그때의 골목이 같은 자리였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인터넷이 퍼지고 대형 서점이 늘어나면서 1980년대 이후 이 골목은 빠르게 기울었다. 한때 100개를 넘던 점포는 지금 20개에서 30개 사이로 줄었다. 문을 닫은 자리마다 다른 간판이 걸리기도 했고, 셔터가 그대로 내려간 채 남은 곳도 있다.
교과서와 잡지를 사려면 이 골목까지 걸음해야 했던 시절은, 대형 서점 체인이 도시 곳곳에 들어서며 저물기 시작했다. 책 한 권을 사는 일이 더 이상 발품을 요구하지 않게 되자, 이 골목까지 찾아올 이유도 하나둘 옅어졌다. 헌책방이 헌책방으로만 버티기 어려워진 시절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래도 남은 서점들은 여전히 문을 연다. 보수서점처럼 모퉁이를 차지한 가게가 있고, 나란히 늘어선 좌판 아래 책을 쌓아 올린 가게도 있다. 지나는 사람이 찾는 분야를 말하면 안쪽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오는 손길이 아직 이 골목에 남아 있다.
기억을 잇는 방법
보수동책방골목문화관이 이 골목에 들어선 것도 그런 흐름 속에서다. 책 박물관과 문화공연, 강연을 통해 피란 세대가 남긴 지식과 희망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한다. 남은 서점들은 저마다 온라인에 책 목록을 올리며 잃어가던 자리를 되찾으려 한다.

이 골목은 근현대사아카이브에 부산의 현대사와 문화 유산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이름을 올렸다. 서류 위의 이름보다는, 지금도 문을 여는 스무 몇 개의 가게가 그 이름을 증명하는 쪽에 가깝다.
함경북도에서 내려온 부부가 헌책 몇 권을 늘어놓았던 그 사거리에서, 지금도 누군가 책장을 넘긴다. 칠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이 골목이 지켜온 것은 어쩌면 책이 아니라, 책을 사고파는 그 손짓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낳은 자리가 골목이 되고, 골목이 문화 유산으로 기록되기까지 한 사람의 생애보다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간판의 수는 줄었지만, 사거리 노점에서 시작됐다는 그 처음 이야기만큼은 어느 기록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사람 중 그 사거리 노점을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책장 사이를 걷다 보면, 누군가 이 자리를 지켜 왔다는 사실이 굳이 설명되지 않아도 전해진다. 오래된 책의 무게가 곧 그 시간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