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책 냄새 사이로 짜이 냄새가 번진다
스무 몇 개로 줄어든 헌책방 곁에, 그림책을 고르고 빙수를 먹는 자리와 짜이를 내리는 자리가 새로 들어섰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29
- 골목
-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이 골목에 남은 서점은 20개에서 30개 사이다. 한때 70여 개가 성업했고, 80년대에는 100개를 넘던 시절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숫자만 보면 이 골목은 줄어드는 일만 남은 곳처럼 보인다.
줄어든 숫자만 따라가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문을 닫은 자리가 그대로 공실로 남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골목에서는 빈자리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는 쪽을 택했다. 무엇이 그 자리를 채웠는지가, 지금 이 골목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골목을 걸어보면 줄어든 자리가 그대로 비어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헌책방이 나가고 남은 자리에 다른 종류의 가게가 들어섰다. 책은 여전히 이 골목의 주인이지만, 책을 대하는 방식이 여럿으로 늘었다. 사고파는 자리 옆에, 머물고 맛보는 자리가 새로 생긴 것이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에서 이 골목의 그림책 코너를 보고 찾아온다. 헌책방을 찾아 발품을 팔던 세대와, 사진 한 장을 보고 걸음을 옮기는 세대가 같은 골목에서 마주친다. 찾아오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마주치는 자리는 같은 골목 안이다.

책이 얼음과 만나는 자리
학문서점에서는 책과 빙수를 함께 낸다. 손님이 찾는 취향을 말하면 그에 맞는 그림책을 골라 건네주는 큐레이션도 함께한다. 헌책방 골목에서 나고 자란 가게가 아니라, 헌책방 골목이 품을 내준 자리에 새로 생긴 가게에 가깝다.
골목 한쪽에는 조용히 머물 수 있는 무인 북카페도 있다. 책방을 구경하다 잠시 앉아 쉴 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하나둘 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저녁이 되면 분위기 좋은 카페로 자리를 옮겨 앉는 발걸음도 있다.
골목 초입에는 인도식 짜이를 내리는 가게도 생겼다. 헌책방 사이를 걷다가 마살라짜이 한 잔을 앞에 두고 앉는 손님의 자리가, 이제 이 골목에서는 낯설지 않다.
간판의 색부터 다르다. 헌책방 간판은 대개 파랑이나 초록 바탕에 흰 글씨로 점포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새로 들어온 카페는 파스텔 색 간판에 손글씨체 로고를 단다. 같은 골목, 같은 처마 아래 걸린 두 종류의 간판이 서로 다른 시대를 가리킨다.

문화관이 지키는 것
보수동책방골목문화관은 다른 방식으로 이 골목을 지킨다. 책 박물관과 문화공연, 강연을 통해 피란 세대가 남긴 지식과 희망의 기억을 전하는 일이다. 카페가 손님의 발걸음을 늘리는 쪽이라면, 문화관은 이 골목이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쪽에 가깝다.
남은 헌책방들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온라인에 책 목록을 올려 두는 곳이 늘었다. 가게 문턱을 넘지 않고도 이 골목의 책 한 권을 찾아낼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카페 한 잔의 매출과 헌책 한 권의 매출은 액수부터 다르다. 그런데도 두 가게가 같은 골목에서 나란히 버티는 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내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짜이 한 잔을 마시러 온 손님도 옆 가게의 헌책 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한다.
헌책방 주인 입장에서 보면 카페는 손님을 나눠 갖는 경쟁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페를 보고 골목에 들어온 손님이 결국 헌책 한 권을 사 들고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해진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보다, 지금 두 종류의 가게가 같은 골목에서 서로의 손님을 나눠 받고 있다는 쪽이 더 정확한 그림일 것이다.

두 개의 시간이 같은 골목에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사장님들이 있다. 그들에게 이 골목은 여전히 책을 사고파는 생계의 자리다. 반면 짜이 한 잔, 그림책 큐레이션 한 번을 위해 처음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이 골목은 사진 찍기 좋은 레트로 여행지에 가깝다.
같은 골목을 걷는 두 무리의 속도는 다르다. 한쪽은 찾는 책 한 권을 향해 곧장 걷고, 다른 한쪽은 골목 전체를 눈에 담으려 천천히 걷는다. 서로 다른 걸음이 같은 시간, 같은 바닥을 밟고 지나간다.
줄어든 간판의 자리를 카페와 큐레이션이 채우는 지금, 이 골목이 향하는 곳이 헌책방 골목인지 새로운 소비의 골목인지는 아직 누구도 단정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여전히 이 골목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손님이 바로 옆 헌책방으로 들어가 책 한 권을 사 들고 나오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 짧은 동선 안에서, 이 골목이 지나온 칠십 년과 지금 새로 생긴 몇 해가 잠깐 겹쳐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