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비가 그치면 종이 냄새가 남는다
젖은 바닥과 마른 책장 사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가 이 골목의 시간을 잰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2.12
- 골목
-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비 오는 아침의 이 골목은 조용하다. 셔터가 반쯤만 올라간 가게들이 늘어선 좁은 통로에 물기가 고여 있다. 오래된 책의 종이 향이 빗물 냄새와 섞여 골목 전체에 낮게 깔린다.
평소라면 사람들의 말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겹쳐 들릴 시간인데, 비가 오는 날은 다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린다. 골목이 원래 어떤 소리로 채워져 있었는지를, 그 소리가 잠시 사라지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된다.
낡은 나무문 앞, 갈색으로 바랜 벽에는 누군가의 오래된 가족사진이 액자째 걸려 있다. 책방 주인의 가족일 수도, 이 골목을 스쳐 간 어느 손님의 기록일 수도 있다. 문 옆으로는 헌책이 빼곡히 꽂힌 책꽂이가 지붕 높이까지 쌓여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빛바랜 책등 사이로 깨끗한 새 책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오래된 것과 갓 나온 것이 같은 서가에 꽂혀 있는 풍경은 이 골목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유독 이곳에서는 그 낙차가 크게 느껴진다. 낡은 종이와 새 종이가 나란히 내는 냄새가 조금씩 다르다.

비가 그치고도 한동안 바닥은 젖어 있다. 셔터를 내린 가게 앞으로 물이 고이고, 그 위로 파란 차양의 그림자가 길게 눕는다. 사람이 없는 시간의 골목은 소리보다 냄새로 먼저 존재를 알린다.
손수레 하나가 젖은 바닥 위에 세워져 있다. 책을 실어 나르던 자리인지, 짐을 옮기다 잠시 세워 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바퀴 자국이 빗물 위에 남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골목이 대신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책방 앞 진열대에는 빈 상자와 접힌 손수레가 나란히 기대어 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물건들이다. 사람이 나와 다시 책을 꺼내 놓기 전까지, 이 골목의 아침은 그렇게 물건들끼리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시간이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
골목 안쪽에는 오래된 돌계단이 있다. 계단 틈으로 풀이 돋아 있고, 난간은 손때로 반들거린다. 한 칸씩 오를 때마다 신발 밑창이 돌에 닿는 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되돌아온다.
계단 옆 가게 벽에는 누군가 붙여 둔 오래된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빛바랜 종이와 텅 빈 나무 선반이 그 아래 나란하다. 지나던 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로 이어진다.

해가 기울면 이 계단의 그림자도 함께 길어진다. 낮 동안 책을 고르던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저녁이 되어서야 문을 여는 카페 쪽으로 몇몇 걸음이 방향을 튼다. 같은 계단인데 낮에 오르는 걸음과 저녁에 내려가는 걸음의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아이 손을 잡고 내려가는 문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위에는 계단조심이라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가 그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책 주간을 알리는 포스터가 서가 한쪽에 걸려 있고, 아이는 그 앞에서 그림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책장을 넘긴다. 말소리는 낮고, 종이 넘기는 소리만 또렷하다. 이 골목에서 가장 조용한 순간은 대개 이렇게, 누군가 책 한 권에 몰두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 사이로 백열등 불빛이 노랗게 떨어진다. 그 빛 아래에서는 표지의 색이 실제보다 조금 더 따뜻하게 보인다. 아이는 고른 책을 품에 안고, 계단을 다시 오를 채비를 한다.

계단을 다 오르면 다시 골목의 바깥 공기다. 안쪽의 낮고 노란 불빛과 바깥의 흐린 하늘빛이 그 경계에서 잠깐 섞인다.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나온 걸음은, 들어갈 때보다 조금 느려져 있다.
골목 끝, 저녁이 되면 불을 밝히는 카페 하나가 있다. 낮 동안 책을 팔던 가게들의 조명이 하나둘 꺼질 즈음, 그 카페의 창만 밝아진다. 책방의 낮과 카페의 저녁이 이 골목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표로 흘러간다.
그 창 안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낮 동안 걸었던 골목이 다르게 보인다. 셔터 내린 헌책방들의 실루엣만 남고, 사람의 말소리 대신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골목이 하루 안에서 두 번 얼굴을 바꾸는 셈이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나면 이 골목은 다시 사람들의 발소리로 채워질 것이다. 그래도 젖은 바닥에 남은 종이 냄새와, 계단을 오르내리던 발소리와, 그림책 앞에서 멈췄던 잠깐의 고요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골목을 나서며 뒤돌아보면, 그 모든 소리와 냄새가 여전히 그 자리에 겹겹이 쌓여 있는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