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단길) 이름은 남고 부대는 떠났다
1969년부터 이 자리에 있던 부대의 이름이, 부대가 사라진 뒤에도 골목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 이름을 딛고 자란 골목은 한 번은 넘치도록 붐볐고, 지금은 다시 조용해지는 중이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14
- 골목
- 경리단길

회나무로, 도로 표지판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다. 그런데 이 길을 아는 사람 중에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들 경리단길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1969년부터 이 자리에 있던 육군중앙경리단에서 왔다. 나라의 살림을 헤아리던 부대였다. 그 부대는 오래전 국군재정관리단으로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입에서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대가 있던 자리라는 사실 하나가 길 이름이 되어 지금까지 남은 셈이다. 지금 이 골목에는 커피를 내리는 사람과 잔을 부딪는 사람들이 있을 뿐, 예산을 헤아리던 이는 더 이상 없다. 부대는 떠났는데 이름만 남아 이 골목을 부르는 방식이 되었다는 사실이, 걸을 때마다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경리'라는 두 글자는 원래 돈을 세고 살림을 꾸리는 일을 가리킨다. 총을 쏘는 자리가 아니라 장부를 정리하는 자리였다는 뜻이다. 그런 사무적인 이름을 가진 부대가, 지금은 전국에서 손꼽히게 화려한 밤거리의 이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골목의 첫 번째 아이러니다.

미군의 이웃들이 자라난 거리
이 골목이 처음부터 붐비던 자리는 아니었다. 바로 옆에 용산 미군기지가 있었고, 그 영향으로 일찍부터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이들의 입맛에 맞춘 식당과 술집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골목은 조금씩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그래도 2000년대 초까지는 여전히 소박한 주택가였다. 외국인들이 오가는 골목이라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번화한 술집과 클럽은 아직 다른 동네의 몫이었다. 지금 사진첩에 남은 화려한 야경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흔적은 지금도 골목 뒤편 낮은 층수의 건물들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화려한 간판이 붙지 않은 벽돌 건물, 좁은 창과 낮은 천장을 가진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여전히 큰길 안쪽에 줄지어 있다. 그 사이사이로 새로 생긴 카페와 편집숍이 끼어드는 모습이 지금 이 골목의 얼굴이다.
기지가 옮겨가며 열린 문
그러다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가는 일이 진행되면서 골목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식당과 술집이 빠르게 늘었다. 조용하던 주택가는 낯선 언어의 간판과 이국적인 메뉴판을 하나씩 내걸며, 도시의 골목 중에서도 꽤 특이한 얼굴을 갖게 됐다.

좁은 오르막을 따라 오래된 다세대주택과 새로 낸 간판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풍경은 이 무렵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술집이던 시절의 흔적은 지금도 골목 곳곳 간판의 크기와 위치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오르막 중간에 서서 위아래를 살피면 그 겹침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지붕 위로 새로 올린 건물의 통유리가 겹쳐 있고, 오래된 국숫집 간판 옆으로 최근 문을 연 가게의 로고가 나란하다. 어느 한쪽도 완전히 밀어내지 않고 겹겹이 쌓아 올린 것이 이 골목이 지금 서 있는 방식이다.
그 겹침이 가장 두꺼웠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 골목을 오래 다닌 이들은 말한다. 좁은 길에 사람이 넘쳐 옆으로 몸을 틀어야 지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때 서울의 골목 문화를 이끌었던 곳이라는 말이 붙는 데에는 그런 밀도의 기억이 깔려 있다.
다시 조용해진 회나무로
화려했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9년 이후로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상권이 흔들렸다. 가게를 내놓는 자리가 늘었고, 셔터가 오래 내려가 있는 가게들도 하나둘 생겼다.

부대가 사라지고, 미군이 옮겨가고, 넘치던 손님이 줄어드는 동안 이 길이 겪은 것은 결국 세 번의 떠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떠난 것들은 매번 이름 하나를 남기고 갔다. 부대는 이름을, 미군은 골목의 성격을, 넘치던 시절은 지금 남은 가게들의 자리를 남겼다.
그 사이에도 회나무로라는 이름은 지도에 그대로 있고, 경리단길이라는 이름도 사람들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부대가 떠난 뒤에도 이름만은 남았던 것처럼, 어쩌면 이 골목은 지금 비어 가는 상가들 뒤에서 또 다른 이름의 시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표지판의 글자는 여전히 회나무로다. 하지만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오늘도 경리단길이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공식 이름과 부르는 이름 사이의 그 작은 어긋남이야말로, 이 골목이 지나온 시간을 가장 짧게 요약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다음에 이 길을 걷는 누군가도 아마 회나무로라는 표지판보다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을 먼저 입에 올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