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진골목) 담쟁이가 뒤덮은 병원 담장, 정소아과
1930년대 근대 건축이 늘어나던 시절부터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소아과 담장. 지금도 진골목을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대구 진골목

진골목을 걷다 보면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건축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로로 세워진 '정소아과의원' 간판입니다. 전깃줄이 어지럽게 걸린 하늘 아래, 붉은 글자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 간판은 대구 중구청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기록해둔 골목 풍경 가운데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간판 아래로는 회백색 돌담이 길게 이어집니다. 담장 위로는 소나무와 담쟁이가 제멋대로 가지를 뻗고, 철제 대문 옆에는 '소아과의원'이라는 글자가 한자로도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담장은 세월에 바랬는데 글자는 여전히 또렷합니다. 이 골목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모순입니다.


서병국 가문과 근대 건축
대문 옆에는 '소아과의원'이라는 한자가 작게 새겨진 패를 따로 걸어둔 흔적도 보입니다. 간판을 두 번 세 번 덧대어온 자국은, 이 건물이 그만큼 오랫동안 쓰임을 이어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 대구 최고 부자로 꼽히던 서병국 등이 진골목에 살던 시절 이런 근대 건축물이 골목 곳곳에 늘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정소아과 건물도 그 흐름 속에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진골목의 대표적인 명소를 꼽을 때 정소아과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대개 세로 간판과 담쟁이 담장을 한 프레임에 담으려 하는데, 이 구도가 진골목을 대표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히곤 합니다.
담장 바로 옆 골목 모퉁이를 돌면 전혀 다른 장면이 이어집니다. 기와지붕을 얹은 또 다른 담장에는 전통 행렬을 그린 타일 벽화가 붙어 있어, 걷는 내내 눈이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병원 간판, 돌담, 벽화가 한 골목 안에 나란히 있다는 것. 그것이 진골목을 천천히 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도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간판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오래된 간판과 대문이 철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골목이 빠른 변화의 물결에서 조금 비켜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카메라에 가장 자주 담기는 피사체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 담장입니다.
진골목을 소개하는 글마다 정소아과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화려한 상업 공간들 사이에서, 이 낡은 담장 하나가 골목의 나이를 가장 솔직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아과라는 업종 자체가 이제는 드물어진 동네 병원의 흔적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큰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는 요즘, 이렇게 한 자리에서 오래 버텨온 작은 병원의 간판은 그 자체로 희소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진골목을 걷는 걸음이 유독 느려지는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담쟁이가 돌담을 타고 오르는 속도는 사람의 걸음보다 훨씬 느립니다. 그 느린 속도가 쌓여 지금의 풍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담장 앞에서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