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후암동)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선 이유
오르막은 숨을 가쁘게 하고, 걸음을 늦춘다. 그 늦춰진 걸음 안에서만 보이는 골목이 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19
- 골목
- 서울 후암동

숙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거기서부터 이미 길이 기울어 있다. 평평한 땅에 익숙한 걸음은 여기서 한 번 흐트러진다.
골목 초입은 좁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고 나면 그 뒤로 사람이 벽에 붙어 서야 하는 폭이다. 오래된 주택과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사이로 계단이 끼어든다. 평평한 동네라면 길이었을 자리가 여기서는 전부 계단이다.
색이 바랜 자리, 새로 칠한 자리
빨간 벽돌집 옆에 낡은 초록색 철문이 있고, 그 철문을 지나면 누군가 최근에 새로 칠한 듯한 파란 담장이 나온다. 담장 위에는 작은 시계 장식과 화분이 올라앉아 있다. 누가 가꾸었는지 모를 꽃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그 옆 전봇대에는 거미줄처럼 전선이 엉켜 있다.

이런 골목을 걷다 보면 이상하게 어릴 적 생각이 난다는 사람이 많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뛰어놀던 기억, 학원으로 도서관으로 가던 길의 감각. 지금 걷는 사람 중 몇은 이 동네에 산 적이 없는데도 그렇게 말한다. 낡은 것들이 가진 힘은 꼭 자신의 기억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기억을 빌려오게 만드는 데 있는 모양이다.
계단 중간에서
108계단 옆 승강기를 타면 몸이 천천히 기울며 올라간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것은 벽돌과 창문, 빨래와 에어컨 실외기들이다. 내려서 뒤를 돌아보면 방금 올라온 높이가 생각보다 훨씬 가파르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다.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를 걸어 오르는 좁은 골목도 있다. 짐을 실은 트럭이 그 경사를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오토바이 한 대가 전봇대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걸음을 멈추고 비켜서야 하는 순간이 한 번은 꼭 있다.
숨이 가빠지는 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중턱에서 한 번 멈추고, 누군가는 끝까지 쉬지 않고 오른다. 다만 멈춰 선 사람이든 계속 걷는 사람이든,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똑같다. 벽돌 틈에 핀 이름 모를 풀, 창틀에 놓인 작은 화분, 누군가 걸어둔 빨래집게.
평지라면 지나쳤을 것들이 오르막에서는 눈에 밟힌다. 걸음의 속도가 느려지는 만큼, 보는 것의 밀도는 높아진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관찰에 가까워지는 지점이 바로 이 중턱 어디쯤이다.

뒤돌아보는 자리
골목을 다 오르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낮은 지붕들이 겹겹이 이어진 풍경이 보인다. 빨간 기와와 파란 슬레이트, 그 사이로 삐죽 솟은 교회 첨탑 하나. 해 질 무렵이면 이 지붕들 위로 빛이 가장 먼저 눕는다.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 골목에 그림자가 길게 눕는 시간이 있다. 담벼락의 절반은 그늘이고 절반은 아직 볕이다. 그 경계선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골목인데도 몇 걸음마다 공기의 온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평평한 길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이 골목은 오르막이라는 이유만으로 멈춰서 보게 만든다. 가쁜 숨을 고르며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