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동 풍물시장) 테이프 먼지
손끝으로 헤집은 카세트 더미에서 낯익은 글씨체 하나가 튀어나온다. 먼지 앉은 케이스 하나에도 누군가의 한 시절이 통째로 들어 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2.11
- 골목
- 황학동 풍물시장

이른 아침의 황학동은 셔터 절반이 아직 내려가 있다. 문을 연 몇몇 가게만 형광등을 켜 두고, 나머지는 어젯밤 그대로 조용하다.
간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가게 앞에는 어제 미처 들이지 못한 물건들이 방수포를 덮은 채 그대로 놓여 있다. 밤새 이슬을 맞은 방수포 위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진다.
주방거리 초입, 스테인리스 조리대와 국솥이 유리창 안쪽에 나란히 서 있다. 아직 팔리지 않은 물건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뿌옇게 빛난다.
바닥에는 붉은 벽돌무늬 보도블록이 골목 끝까지 이어진다. 그 위로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고, 바퀴가 무늬 이음매를 넘을 때마다 낮은 소리가 골목에 울린다.
골목 안쪽에서는 셔터를 반쯤 올리는 소리가 이따금 들린다. 쇠 셔터가 레일을 긁으며 올라가는 그 소리가, 이 골목의 하루를 여는 신호에 가깝다.
손으로 뒤지는 시간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카세트테이프가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를 만난다. 안쪽까지 다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눌려 있어, 손을 넣고 뒤적여야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케이스마다 붙은 가수의 얼굴이 빛이 바래 누렇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를 꺼내 들면, 표지에 적힌 노래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낯익은 글씨체다.
케이스를 열어 보면 테이프 자체에도 사인펜으로 눌러 쓴 글씨가 남아 있다. 누군가 손수 적어 넣은 제목이, 인쇄된 표지보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읽힌다.
이곳에 쌓인 엘피와 씨디, 테이프는 몇십 년치 유행이 한꺼번에 뒤섞인 모습이다. 선반을 채운 순서가 따로 없어 보이는데도, 오래 다닌 사람은 원하는 것을 금세 찾아낸다.
엘피판 쪽은 종이 재킷 색이 저마다 다르게 바래 있다. 먼지를 한 번 훅 불어내고 나서야 재킷에 적힌 글씨가 겨우 읽힌다. 손끝에는 옅은 먼지만 허옇게 묻어난다.
선 채로 몇 장을 넘기다 보면 허리가 아파 온다. 그래도 손을 멈추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다음 장에 무엇이 나올지 끝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낮이 넘어가는 소리
정오가 지나면 주방거리의 셔터들이 하나둘 완전히 올라간다. 대한주방, 종합주방 같은 간판 아래로 스테인리스 조리대와 국솥, 의자와 테이블이 인도까지 나와 줄줄이 늘어선다.

가구거리 쪽 인도에는 의자만 따로 모아 놓은 가게가 있다. 나무 의자와 철제 의자, 색이 다른 쿠션 의자가 뒤섞여 한 줄로 늘어서 있는데, 어느 것에 앉아 보아도 삐걱이는 소리가 다르다.
의자마다 붙은 가격표가 손 글씨로 적혀 있다. 숫자 하나를 확인하려고 몸을 숙이는 사이, 옆 가게에서 물건을 부리는 소리가 끼어든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트럭 한 대가 지나가고,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고, 그 사이사이 걷는 사람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조용한 골목일수록 작은 소리가 크게 남는다.
그 발소리의 주인은 대개 목적지가 분명하다. 구경하러 온 걸음과 사러 온 걸음은 속도부터 다르다는 것을, 몇 번만 걸어 봐도 알 수 있다.
해가 기울 때
해가 기울면 골목의 조명이 바뀐다. 형광등 대신 색색의 네온 간판이 하나둘 켜지고, 하늘은 주황빛에서 남색으로 넘어간다. 낮 동안 조용하던 골목이 그제서야 사람 소리로 채워진다.
포장마차와 분식집 앞으로 줄이 생기고, 떡집과 만두집 간판에도 불이 들어온다. 머리 위로는 색색의 전구 줄이 길게 이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빛이 따라온다.

낮의 황학동과 저녁의 황학동은 같은 골목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른 얼굴을 한다. 하나는 물건을 뒤적이는 손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시간이다.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위에 적힌 노래 제목 하나가 계속 눈에 밟힌다. 그 노래를 마지막으로 들은 사람이 지금 이 골목 어디쯤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걸음을 조금 늦춘다.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개 이 골목을 잘 아는 쪽이다. 처음 온 사람은 이미 어두워진 골목 입구에서 방향을 가늠하느라 걸음이 느려진다.
돌아 나오는 길, 주방거리 쪽에서 국솥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새 냄비를 골라 두드려 보는 소리다. 테이프 더미의 정지된 시간과 냄비 두드리는 소리의 지금 이 순간이 한 골목 안에서 동시에 흐른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오면 방금까지의 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신호등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골목의 간판 불빛만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