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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스팟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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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황학동 풍물시장) 오후 두 시의 골목

정은TV, 정우전자, 백두전자. 간판은 그대로 걸려 있는데, 골목은 어느 순간부터 텅 비기 시작했다.

글
alleymag.
발행
2026.01.29
골목
황학동 풍물시장
오후 두 시의 골목
Artwork by alleymag.

정은TV, 정우전자, 백두전자. 낡은 간판들이 골목 초입부터 한 줄로 걸려 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마다 그 위에 다시 덧칠한 흔적이 보인다.

가게 안은 여전히 물건으로 가득하다.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천장까지 쌓여 있고, 흑백부터 컬러, LCD, LED까지 텔레비전의 모든 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골목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반 한쪽에는 낡은 오실로스코프도 놓여 있다. 녹색 화면에 손잡이가 빼곡한 이 계측기는 수리하던 시절 고장 난 곳을 찾아낼 때 쓰던 도구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누군가는 여전히 이 골목에서 물건을 고치고 있다는 뜻이다.

오후 두 시, 한창 장사가 될 시간에 골목이 비어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물건은 그대로인데, 그 물건을 사이에 두고 흥정하던 사람들의 발소리만 사라졌다.

지나는 사람이라고는 낡은 여행가방 앞에 쪼그려 앉은 이 한 명 정도다. 가게 앞에 내놓은 스피커와 라디오 더미 사이를 지나, 목적지를 정한 걸음으로 골목 끝까지 걸어간다.

Artwork by alleymag.

고치던 손, 사라진 손님

한때 이 골목은 부품 창고였다. 텔레비전이나 전축을 고치다가 부품 하나가 없으면 다들 이 골목으로 왔다. 같은 모델의 고장 난 물건을 통째로 구해다가, 살아 있는 부품만 떼어 붙이는 식이었다.

그 시절 상인들은 어떤 부품이 어느 가게 몇 번째 선반에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손님이 가져온 물건의 모델명만 들어도 짐작이 가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발품이 곧 실력이었다.

부품 하나 구하자고 텔레비전 한 대를 통째로 사 오는 셈이니, 요즘 계산으로는 손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렇게 살려낸 물건 하나하나가 곧 이 골목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쓰는 사람 자체가 줄었다. 부품 하나를 구하느니 새 제품을 사는 편이 빠르고 싸다는 계산이, 이 골목의 손님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간판은 그대로 걸려 있어도, 그 간판이 걸린 이유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바뀌었어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겉모습만은 예전 그대로다.

가게 앞에 나와 앉은 사람의 얼굴도 예전과 다를 수 있다. 간판과 진열장은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그 안에서 손님을 맞는 손은 세대가 한 번 바뀐 뒤일 때가 많다.

Artwork by alleymag.

버틴 건물, 떠난 사람

골목 한가운데, 새 건물들 틈에 낮은 이층집 한 채가 끼어 있다. 파란 양철지붕 아래 걸린 간판에는 '황학 1779'라고 적혀 있다. 글씨 아래로는 녹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길게 남았다.

영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한눈에 가늠하기 어렵다. 바로 옆으로는 빨간 간판을 단 곱창집이 번쩍이는데, 이 집만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하다. 주변이 다 바뀌어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건물이 있다.

그 앞을 지나 골목 끝까지 걸어도 마주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던 시간대였다고들 한다. 지금은 그 좁은 길이 한 사람만 지나가도 넉넉하다.

낮 동안 그 골목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 쪽이다. 텔레비전과 스피커, 카세트 라디오가 사람 대신 가게 앞에 줄지어 손님을 기다린다.

몇 걸음 밖은 다른 골목

그런데 몇 걸음만 벗어나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곱창골목 쪽으로 접어들면 저녁 손님을 받는 가게들이 간판에 불을 켜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자리를 채운다.

Artwork by alleymag.

같은 황학동인데, 전자골목은 오후 두 시에 비고 곱창골목은 저녁이면 찬다. 하나의 골목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는 셈이다.

고쳐 쓰던 시절의 손님은 떠났어도, 먹고 마시러 오는 손님은 여전히 이 동네를 찾는다. 골목이 완전히 비어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달라졌을 뿐이다.

같은 시각, 전자골목의 셔터는 이미 절반 넘게 내려가 있다. 하루의 장사를 끝낸 것이 아니라, 애초에 오늘 하루도 손님이 많지 않았던 것에 가깝다.

골목을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이 정적이 새삼스럽지 않을 것이다. 물건이 있다고 다 팔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골목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자골목 끝에서 곱창골목 쪽으로 다시 걸어 나가면, 방금 지나온 정적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몇 걸음 차이로 시간이 달라지는 이 골목에서, 물건을 기다리는 일과 손님을 맞는 일은 같은 하루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정은TV 위에 놓인 작은 카메라 하나가 화면 속에 골목 풍경을 그대로 비춘다. 이 텔레비전, 아직 멀쩡하게 나온다는 뜻이다. 다만 그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이제는 많지 않을 뿐이다.

FIELD PHOTOS : 현장에서 모은 사진
SCENE 01 : 정은TV 전문상회
jsyou2994가 촬영한 정은TV 전문상회입니다. 흑백부터 컬러, LCD, LED까지 텔레비전의 모든 세대가 가게 하나에 쌓여 있습니다. 화면 위에 작은 카메라를 달아 두어,jsyou2994가 촬영한 정은TV 전문상회입니다. 흑백부터 컬러, LCD, LED까지 텔레비전의 모든 세대가 가게 하나에 쌓여 있습니다. 화면 위에 작은 카메라를 달아 두어,
▲ 서울 중구 황학동 · 2026.09 / 사진 jsyou2994 · https://blog.naver.com/jsyou2994/224422487931 jsyou2994가 촬영한 정은TV 전문상회입니다. 흑백부터 컬러, LCD, LED까지 텔레비전의 모든 세대가 가게 하나에 쌓여 있습니다. 화면 위에 작은 카메라를 달아 두어, TV가 아직 멀쩡히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SCENE 02 : 황학 1779, 그리고 빈 골목
jsyou2994가 촬영한 황학 1779 건물과 그 옆 전자골목입니다. 파란 양철지붕을 인 낮은 건물 하나가 새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고,jsyou2994가 촬영한 황학 1779 건물과 그 옆 전자골목입니다. 파란 양철지붕을 인 낮은 건물 하나가 새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고,
▲ 서울 중구 황학동 · 2026.09 / 사진 jsyou2994 · https://blog.naver.com/jsyou2994/224422487931 jsyou2994가 촬영한 황학 1779 건물과 그 옆 전자골목입니다. 파란 양철지붕을 인 낮은 건물 하나가 새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고, 정우전자와 백두전자 같은 간판들이 늘어선 골목은 오후에도 한산합니다.
SCENE 03 : 저녁이면 차는 골목
hn_bong이 촬영한 영미네곱창 일대 거리입니다. 전자골목과 달리 이 구간은 저녁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는, 같은 황학동 안의 또 다른 시간대를 보여줍니다.hn_bong이 촬영한 영미네곱창 일대 거리입니다. 전자골목과 달리 이 구간은 저녁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는, 같은 황학동 안의 또 다른 시간대를 보여줍니다.
▲ 서울 중구 황학동 · 2026.05 / 사진 hn_bong · https://blog.naver.com/hn_bong/224274748998 hn_bong이 촬영한 영미네곱창 일대 거리입니다. 전자골목과 달리 이 구간은 저녁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는, 같은 황학동 안의 또 다른 시간대를 보여줍니다.
이 글은 2026년 방문 기록과 골목 현장에서 확인한 간판, 건물 정보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발행 이후 새로 확인되는 방문 기록이 있으면 사진과 내용을 갱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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