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림동) 땅값이 가장 쌌던 자리였다
양림동이 선교사들의 동네가 된 것은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가장 싼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 흔한 이유 하나가 백 년 넘게 이 골목의 생김새를 결정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9.08
- 골목
- 광주 양림동

양림동이라는 이름은 버드나무숲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버들 양(楊)에 수풀 림(林), 글자 그대로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이라는 뜻이다. 1481년에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에도 이미 양림산(陽林山)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지금 걷는 이 길의 이름이 오백 년도 더 전부터 이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숲이 처음부터 사람을 반기는 자리는 아니었다. 버드나무가 울창했던 양림은 숨진 아이를 짚에 싸 나무에 걸어 두는 풍장을 치르던 터였다. 마을 가장자리, 사람들이 가까이 가길 꺼리던 땅이었다. 그래서 값이 쌌다.
1904년 말, 미국 선교사 배유지(유진 벨)와 오웬이 목포를 거쳐 광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이 양림리 동산이었다. 좋은 땅을 두고 굳이 여기를 택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이 큰돈 없이 정착할 수 있는 땅이 여기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형편이 먼저 있었던 선택이다.
학교와 병원이 들어선 자리
일단 자리를 잡은 뒤의 속도는 빨랐다. 선교사들은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제중원을 차례로 세웠다. 풍장터였던 언덕에 배움과 치료의 공간이 들어서면서, 양림동에는 '광주의 예루살렘', '서양촌'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피하던 땅이 도시에서 가장 낯선 건물들이 모인 자리로 바뀐 것이다.

그중 제중원은 지금의 기독병원으로 이름이 이어진다. 학교는 이름이 바뀌고 자리를 옮기기도 했지만, 병원만은 백 년 넘게 거의 같은 자리를 지키며 이어져 왔다. 지금도 양림동 골목의 가게들이 주차 안내를 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이름이 이 병원이다. 선교사가 세운 치료의 공간이, 지금은 카페 손님의 주차장으로 쓰이는 셈이다.
그 시기에 지어진 건물 가운데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05년에 짓고 1921년에 증축한 2층 벽돌 건물로, 광주에 남은 서양식 주택 중 가장 오래됐다. 아치형 창과 가파른 지붕선이 한옥 처마 사이에서 유독 낯선 윤곽을 그린다. 백 년을 넘게 서 있었다는 사실이 벽돌의 짙은 색에 그대로 쌓여 있다.
그 벽돌 건물 혼자 시간을 견딘 것은 아니다. 골목에는 백 년을 넘긴 나무들이 여전히 가지를 뻗고 있고, 근대 건축물과 선교 관련 문화유산이 그 그늘 아래 나란히 서 있다.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건물 하나가 아니라 나무와 담장과 골목의 폭까지 그 시절의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걸어 보면 그 시절의 버드나무숲이 통째로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군데군데 드리운 가지들이 여전히 골목 입구를 가린다.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서야 비로소 다음 길이 보이는 구조는, 이 동네가 처음부터 숨어 있던 땅이었다는 사실을 걸음으로 확인시켜 준다.

집이 비면 누군가 다시 채운다
선교사들이 들어온 지 백 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빈 땅이 다시 채워졌다. 2013년, 동네의 집 한 채가 불에 타 흉가로 방치됐다. 치우는 사람도, 사겠다는 사람도 없던 자리를 정리한 건 선교사가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었다. 쓰레기를 치우고 텃밭을 일구고, 쓰던 생활용품을 벽에 걸어 장식으로 바꿨다.
이름은 그 무렵 동네에 살던 한 어르신에게서 왔다. 다리를 다쳐 뒤뚱거리며 걷던 걸음걸이가 펭귄을 닮았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골목을 펭귄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거창한 선포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끼리 주고받던 별명이 그대로 지명이 됐다.
지금 그 골목 초입에는 펭귄 모양의 이정표가 서 있다. 그 표지를 따라 들어가면 오래된 시계와 간판, 쓰던 생활용품들이 담장과 벽을 따라 재미나게 꾸며져 있어 절로 웃음이 난다는 방문객이 많다. 1970~80년대 생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라,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추억이 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낯선 구경거리가 된다. 선교사들이 벽돌과 유리창으로 서양을 들여왔다면, 주민들은 고장 난 시계와 빛바랜 간판으로 자신들의 시간을 골목에 걸어 둔 셈이다.
그래서 지금 양림동을 걸으면 두 개의 시절이 한 골목 안에 나란하다. 선교사가 세운 벽돌 건물과 주민이 되살린 빈집은 생긴 이유도, 생긴 시기도 다르다. 하나는 땅값이 싸서 외지인이 들어왔고, 다른 하나는 집이 비어서 주민이 다시 채웠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버려졌거나 외면받던 자리에서 시작됐다는 사실뿐이다.

양림동이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2008년 무렵부터 광주시가 이 일대를 가꾸기 시작했고, 2010년대 중반 들어서야 근대건축물과 카페가 어우러진 거리로 입소문을 탔다. 선교사가 들어온 지 백 년, 펭귄마을이 생긴 지 십 년이 넘어서야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동네가 된 것이다.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땅의 사정을 모른 채 걷는다. 한옥과 서양식 건물이 나란한 풍경을, 담장 너머로 로스팅 커피 냄새가 풍기는 한옥카페를 그저 예쁘다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그 '예쁘다'는 감상 뒤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 싸게 넘겨졌던 땅이 아무도 손대지 않아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다는 긴 사정이 깔려 있다. 오래된 선교사 주택과 근대 건축물, 작은 미술관과 카페, 골목길과 전시공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지금의 풍경은, 그래서 누군가 설계한 결과라기보다는 아무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시간이 쌓인 결과에 가깝다.
싼 땅이었던 자리가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을 지켜낸 자리가 되고, 흉가였던 집이 가장 사랑받는 골목이 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동네의 매력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어쩌면 아무도 바라지 않던 땅이었기에,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