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명주동 커피거리) 소나무 향이 먼저 마중 나온다
이 골목에는 파도 소리가 없다. 바다를 낀 커피거리는 따로 있고, 여기는 낡은 간판과 좁은 골목, 그리고 적산가옥에서 새어 나오는 소나무 향이 전부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2.12
- 골목
- 강릉 명주동 커피거리

명주동으로 들어서는 초입은 별다른 표지판 없이도 알아챌 수 있다. 큰길의 간판들이 갑자기 낮아지고 색이 바랜다. 시청이 떠난 뒤 오래 방치되었던 시간이 페인트 위에 그대로 앉아 있는 듯하다. 그 빛바랜 간판 몇 개를 지나야 비로소 카페 냄새가 섞여 든다.
이 골목에는 바다가 없다. 강릉에서 커피거리라 하면 흔히 해변을 먼저 떠올리지만, 명주동은 파도 소리 대신 좁은 골목과 오래된 벽이 전부다. 대신 골목 전체에 커피 향이 옅게 떠돈다. 한 집에서 나는 향이 아니라 여러 집의 향이 뒤섞여 골목 공기 자체에 배어든 느낌이다. 어느 문 앞을 지날 때 유독 향이 짙어지면, 그 안에서 원두를 볶고 있다는 뜻이다. 걷다 보면 그 차이가 오히려 걸음을 늦춘다. 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기보다 발밑 보도블록의 결을 따라 걷게 된다. 골목의 폭도 큰길보다 확실히 좁다. 양옆 건물이 가까이 붙어 있어 한낮에도 그늘이 지는 구간이 있고, 오래된 벽돌담과 나무 대문이 드문드문 남아 카페 간판을 걸지 않은 건물은 여전히 예전 얼굴 그대로다.

백 년 묵은 나무 냄새
골목 안쪽에는 백 년 넘게 버텨온 적산가옥 한 채를 고쳐 연 카페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된 나무 기둥 사이로 소나무 향이 먼저 마중 나온다고, 다녀간 이가 적어 두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 오래 품고 있던 냄새가 갓 내린 커피 향과 뒤섞이는 자리라는 뜻이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 다 이 방에 실제로 있는 냄새라는 사실만 남는다.
골목의 다른 한옥카페 한 곳은 마당에 정원을 두고 원두를 직접 볶는다. 로스팅을 전문으로 한다는 이 자리는 원두 볶는 냄새와 마당의 풀 냄새가 시간대에 따라 번갈아 짙어질 것이다. 창을 열어 두었는지 닫아 두었는지에 따라 같은 자리가 다른 냄새로 기억되는 셈이다.

방앗간이었던 자리
몇 걸음 더 걸으면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자리가 나온다. 지금은 레트로 감성을 내세운 카페가 들어서 핸드드립을 내린다. 곡식을 빻던 자리에서 원두를 갈고, 그 소리가 절구질을 대신한다고 상상하면 묘하게 앞뒤가 맞는다. 세탁소였던 자리들도 비슷한 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그 자리에 서 보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말끔하다. 흔적을 지운 자리와 지우지 않은 자리가 골목 안에 섞여 있다. 이 골목을 걷는 속도는 자연히 느려진다. 급하게 지나칠 만한 폭이 아니고, 한 집 한 집 문 앞에 붙은 안내문을 들여다보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어느 문 앞에는 옛 상호가 새 간판 아래 작게 남아 있어, 이 자리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카페 하나를 들여다보니 고양이 두 마리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느릿하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손님이 오가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 고양이들 때문에, 이 골목 어느 카페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먼저 자리를 고르는 곳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조용한 골목에 어울리는 속도다.

2층에서 내려다본 골목
테라스가 딸린 카페, 2층 통창으로 골목을 내려다보게 만든 카페도 여럿이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낮은 지붕들 너머로 다음 골목이 이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골목의 굴곡이 위에서는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낮게 걸리는 시간이면 그 지붕들 사이로 빛이 비스듬히 떨어진다. 그 창가 자리는 시간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사람이 몰려 이야기 소리가 겹치는 때가 있고, 멀리서 그릇 부딪는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리는 조용한 때도 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카페마다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낮 동안 조용하던 골목이 그 불빛 몇 개로 다시 사람의 자리처럼 보인다. 시청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빈 골목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속도로 켜지는 창문들이다.
골목 끝에서 뒤를 돌아보면 낮과는 다른 풍경이 보인다. 낮에는 빛바랜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던 자리가, 저녁에는 그 위로 카페의 불빛이 겹쳐 따뜻해 보인다. 같은 골목이 하루 안에서도 두 번 얼굴을 바꾸는 셈이다. 이 골목을 처음 걷는 사람은 어느 쪽 얼굴을 먼저 기억하게 될까. 바다가 없어도 이 골목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파도 소리가 없어도 충분히 남는 것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