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흰여울문화마을) 계단을 다 내려가면 파도 소리뿐이다
좁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금기 밴 바람과 커피 냄새가 번갈아 지나간다. 이 비탈을 걷는 일은, 결국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부산 흰여울문화마을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좁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빠듯한 골목 사이로, 파란 지붕과 흰 벽이 번갈아 스친다. 바다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골목이 몇 번 꺾이고 나서야 시야 한쪽이 트이면서 물빛이 끼어든다.
낡은 양철 지붕 창고 하나가 온통 손바닥만 한 꽃 그림으로 덮여 있다. 누군가 하나씩 그려 넣었을 꽃송이들 사이로 전깃줄이 어지럽게 지나가고, 그 너머로 바다가 넓게 펼쳐진다. 낡은 것과 그려 넣은 것, 멀리 있는 것이 한 시야 안에 함께 들어온다.
내리막의 속도
마을 안쪽, 건물과 건물 사이로 바다가 정면으로 걸리는 내리막이 있다. 전봇대 하나가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걸음이 자연히 빨라진다.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길은 걷는 속도마저 바꿔 놓는다. 앞서 내려가는 사람의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온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절영해안산책로가 이어진다. 발밑은 나무 데크에서 다시 돌바닥으로, 또 울퉁불퉁한 바위로 바뀐다. 바닥의 질감이 바뀔 때마다 걸음의 리듬도 따라 바뀐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골목의 적막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채운다.
산책로 난간 너머로 붉은 등대 하나가 서 있다. 그 뒤로 둥글게 깎인 바위와 잔잔한 만이 이어진다. 화물선 몇 척이 먼바다에 점처럼 떠 있고, 파도는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흰 거품을 일으켰다가 금세 가라앉는다.
바람의 소금기
해안 쪽으로 가까이 다가설수록 바람에서 소금기가 느껴진다. 골목 안에서는 몰랐던 냄새다. 집들의 담장이 바닷바람을 한 겹 막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장을 벗어나고서야 알아차리게 된다.

산책로 한쪽에는 커다란 고리 모양의 조형물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둥근 틀 안으로 지나가는 배와 수평선이 액자처럼 걸린다. 사람들은 그 고리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바다 쪽으로 눈을 둔다.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도 이 자리에서는 속도를 늦춘다.
산책로가 끝나는 자리, 나무 데크 계단이 파란 지붕을 인 작은 선착장 쪽으로 내려간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걷는 발걸음 뒤로, 정박한 배 몇 척과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린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더는 걸음 소리가 아니라 파도 소리뿐이다.
다시 골목 쪽으로 걸음을 돌리면 소금기 밴 바람이 조금씩 옅어지고, 그 자리를 어디선가 풍기는 커피 냄새가 채운다. 바다의 시간에서 마을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경계가, 이 짧은 골목 하나에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마을은 그렇게 두 얼굴을 오간다. 집들의 담장이 바람을 막아 주는 안쪽의 시간과, 담장이 끝나고 파도 소리만 남는 바깥의 시간. 어느 쪽이 이 마을의 진짜 얼굴인지는, 계단을 몇 번 오르내려 본 사람만이 겨우 짐작할 수 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골목의 빛도 달라진다. 낮 동안 흰 벽을 밝게 비추던 햇살이 비스듬히 누우면서, 담장 그림자가 길게 골목 바닥에 늘어진다. 낮에는 못 보고 지나쳤던 벽의 얼룩과 빛바랜 페인트 자국이 그 비스듬한 빛 아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같은 골목을 두 번 걸어도, 걷는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골목을 보게 되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