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온양온천거리) 이 물은 임금의 병을 고치려 끓었다
눈병을 앓던 세종이 이 물에 몸을 담근 뒤로, 임금들은 대궐을 비우고 이 작은 고을로 걸음을 옮겼다. 그 물은 지금도 식지 않고 흐른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05
- 골목
- 아산 온양온천거리

온양이라는 이름보다 이 물이 먼저 있었다. 백제 때는 탕정군이라 불렸고, 신라 때는 탕정주, 고려 때는 온수군이었다. 나라가 세 번 바뀌는 동안 이 땅을 부르는 이름은 매번 달라졌지만, 그 밑을 흐르는 뜨거운 물줄기만은 바뀐 적이 없다. 문헌으로 남은 기록만 따져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이름이 붙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433년, 세종이 눈병을 고치러 이 물을 찾았다. 당시로서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지방까지 내려오는 일이 흔치 않았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이후로도 세종은 몇 차례 더 이 자리를 찾았고, 1442년 그 행차를 계기로 고을의 이름이 온양군으로 바뀌었다. 따뜻할 온, 볕 양. 물의 온기와 볕의 온기를 한 글자씩 끌어다 붙인 이름이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종으로 끝나지 않았다. 현종, 숙종, 영조, 정조까지, 조선의 임금들은 대를 이어 이 물가에 몸을 담그러 내려왔다. 몸이 아파서였다. 온궁, 그러니까 온천 곁에 지은 임시 궁을 짓고 머물며 탕치를 했다. 휴양이 아니라 치료였다는 사실이 이 거리의 축을 이룬다. 지금 사람들이 피로를 풀러 이 물에 몸을 담그는 것과, 몇백 년 전 임금이 병을 고치러 온 것은 그 몸짓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 임금이 한 번 다녀간 것으로 끝났다면 이 자리는 그저 옛이야기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몇 대에 걸쳐 임금이 바뀔 때마다 신하들은 다시 온궁을 손보고, 다시 행차 길을 정비했다. 그만큼 이 물의 효험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온천 하나를 두고 조정이 대를 이어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이 거리가 단순히 '물 좋은 동네'로 그친 적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온궁이 남긴 흔적
1464년, 온천행궁에 머물던 세조의 앞뜰에서 느닷없이 맑은 샘이 솟았다. 온천수 옆에서 차가운 물이 솟아나는 게 신기하고 상서롭다 하여 세조는 그 샘을 신정이라 이름 지었다. 열두 해 뒤인 1476년, 성종이 이를 기려 신정비를 세웠다. 뜨거운 물 곁에 차가운 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 하나가 비석으로 남을 만큼, 이 자리는 예사 온천이 아니었다.
정조는 이 자리에 다른 종류의 마음을 남겼다.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행궁 자리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단을 쌓아 영괴대라 이름했다. 몸을 고치러 온 자리에서 아버지를 떠올린 셈이다. 온양의 온천은 그래서 병을 다스리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다스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신정비와 영괴대, 이 두 흔적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우연히 솟은 샘물을 기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리려 손수 나무를 심은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몸을 씻으러 온 사람이 뜻밖의 발견에 비석을 세우고,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가장 사사로운 그리움을 풀어놓았다. 온천이라는 물리적인 치료 행위 곁에, 이렇게 저마다 다른 마음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셈이다.

기차가 들어온 뒤
임금의 발길이 끊긴 자리에 다음으로 닿은 것은 기차였다. 1922년, 온양온천역이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다. 가마를 타고 며칠을 걸려 내려오던 길이 기차로 몇 시간 거리가 되자, 이 물을 찾는 사람의 신분도 바뀌었다. 임금 한 사람의 치료처였던 자리가 누구나 올 수 있는 목욕탕으로 열렸다.
역은 몇 번 다시 세워졌다. 1983년 7월 역사 신축에 들어가 그해 12월 준공했고, 2008년 4월에는 새 역사로 역무가 옮겨졌다. 같은 해 12월에는 수도권 전철이 온양온천역까지 이어졌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 거리가 된 뒤로, 이 역 앞 풍경은 또 한 번 바뀌었다.
역이 세 번 몸을 바꾸는 동안, 역을 찾는 사람의 폭도 함께 넓어졌다. 1922년의 역은 열차표를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자리였고, 1983년의 역은 자가용과 고속버스로 더 쉽게 오갈 수 있는 시대의 역이었다. 2008년 전철이 닿은 뒤로는 왕복 차비 몇천 원으로, 당일치기로 다녀갈 수 있는 역이 됐다. 몸을 담그러 오는 일의 문턱이 그렇게 조금씩 낮아진 셈이다.
그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받아낸 곳이 시장이다. 온양 장터는 원래 행궁의 수라상에 올릴 식재료를 대던 자리였다고 전한다. 임금의 부엌과 이어져 있던 장이 세월이 흐르며 1950년대 오일장으로 다시 섰고, 옛 장터에서 지금의 온천동으로 자리를 옮겨 온양온천시장이 되었다. 2008년 전철이 닿은 뒤로는 통근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으로 성격이 한 번 더 바뀌었고, 2010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지금도 이 시장은 상설로 매일 문을 열면서, 동시에 매달 4일과 9일에는 오일장이 함께 선다. 수라상을 대던 장터의 리듬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날짜를 바꿔 가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평소보다 좌판이 늘어나는 그 며칠, 시장통 골목은 유난히 활기가 짙어진다고 전한다. 임금의 부엌에 물건을 대던 날과 지금의 장날이 같은 날짜 감각 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정해진 날에 사람이 몰린다'는 이 장터의 습성만큼은 오래전부터 그대로다.
그래서 지금 여기 남은 것
이 일대가 공식으로 관광지라는 이름을 단 것은 1971년이다. 1985년에는 국민관광지로 한 번 더 지정됐다. 나라가 이름을 붙이기 한참 전부터 이미 이곳은 사람이 찾아오는 자리였으니, 행정이 뒤늦게 현실을 뒤쫓아온 셈이다.
지금 역에서 내려 시장 쪽으로 걷다 보면, 임금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 거리를 걷는 걸음이 유난히 느긋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 몇백 년째 식지 않은 물 때문일 것이다. 세종이 눈을 씻던 물과 지금 누군가 발을 담그는 물이 같은 땅 밑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은, 이 거리를 걷는 사람 대부분이 모르고 지나친다. 몰라도 상관없다. 그 물은 알아주지 않아도 여전히 끓고 있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