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원곡동 다문화거리) 골목 하나를 건너면 나라가 바뀐다
같은 보폭으로 걷는데 냄새가 바뀌고 말소리가 바뀐다. 해가 떨어지면 간판마다 불이 들어오고, 이 거리는 지도 없이도 여행이 되는 몇 안 되는 동네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안산 원곡동 다문화거리

골목 하나만 건너면 언어가 바뀐다. 향신료 냄새가 달라지고, 하루의 리듬마저 바뀐다. 중국어 간판이 늘어선 블록을 지나면 러시아어가 적힌 마트가 나오고, 몇 걸음 더 가면 베트남어로 쓰인 쌀국수집 유리창에 김이 서려 있다. 이 거리를 걷는 일은 국경 없이 나라를 옮겨 다니는 일과 비슷하다.
낮의 골목은 장보기의 시간이다. 과일가게 앞에 쌓인 망고스틴과 두리안 사이로 할머니들이 흥정을 하고, 머리 위로는 쌀국수 간판과 함께 작은 국기들이 줄줄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린다. 오토바이 한 대가 사람들 사이를 느리게 지나가고, 지나가던 누군가 멈춰 서서 과일을 고른다. 해외여행을 가지 않고도 다른 나라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다.

냄새가 길을 알려준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거리는 냄새로 먼저 바뀐다. 쌀국수의 김이 오르고, 양꼬치 숯불이 타오르며, 커민과 고수와 향신료 냄새가 공기를 채운다. 향신료 향이 골목마다 바뀌는 것이 이 거리의 매력이라서, 걷기만 해도 지금 어느 나라의 골목에 들어섰는지 짐작이 간다. 한 집 건너 매캐한 숯불 냄새, 또 한 집 건너 달콤한 빵 굽는 냄새. 코가 먼저 국경을 넘는다.
골목 안쪽의 한 마트에 들어서면 바깥의 소음이 뚝 끊긴다. 나무로 마감된 벽과 좁은 통로 사이로 키릴 문자가 적힌 병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히토 맛 탄산음료, 자작나무 수액 음료, 처음 보는 라벨의 초콜릿까지. 계산대 뒤 CCTV 안내문마저 낯설게 느껴지는 이 작은 매장은, 누군가에게는 고향 마트와 가장 닮은 공간일 것이다. 선반 사이를 걷는 발소리만 또각또각 울리는 그 몇 분 동안은, 여기가 안산인지 다른 어느 나라인지 잠깐 헷갈린다.

불이 켜지는 시간
밤이 되면 거리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한다. '세계음식거리'라고 적힌 아치 아래로 네온 간판들이 하나둘 켜지고, 커피 잔 모양의 간판과 다국어로 쓰인 상호들이 붉고 푸른 빛을 골목 바닥에 흩뿌린다. 주말 저녁은 유독 붐비니, 느긋하게 걷고 싶다면 이른 저녁이 낫다는 것도 이 거리를 아는 사람들의 요령이다. 현금이나 계좌이체가 아직 더 편한 가게도 더러 있어서, 서두르지 않고 준비해 가면 당황할 일이 적다.

저녁엔 불판 위에서 숯불 조개구이가 하나둘 입을 열고, 마지막엔 칼국수 사리를 넣어 국물을 마무리하는 코스가 이 거리의 정석으로 통한다. 낯선 메뉴 앞에서 망설여진다면 양꼬치나 쌀국수처럼 익숙한 것부터 시작해도 좋다. 입을 조금 풀고 나면, 옆 가게의 낯선 글자도 그저 다음에 가볼 곳의 이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몇 가지 언어가 동시에 울린다고 한다. 놀이터에서는 국경보다 웃음이 먼저 오간다는 말도 있다. 그 말을 들은 뒤로, 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간판과 냄새와 말소리가 결국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든, 결국 누군가의 저녁 식탁에 닿는다는 것. 그 식탁 위에 어떤 말이 오가든, 숟가락을 드는 손의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