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제민천 거리) 구제할 민(民), 이름에만 남은 물
제민천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하천이다. 그 이름이 무색하게 오래 낡아 있던 이 물줄기 옆으로, 최근 몇 년 새 다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1.18
- 골목
- 공주 제민천 거리

제민천(濟民川)이라는 이름에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공주시 금학동 주미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남에서 북으로 4.2킬로미터를 흐르며 원도심 한가운데를 가른다. 큰 강이라 부르기엔 폭이 넉넉지 않고,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실개천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이 가는 물줄기에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무거운 이름이 오래도록 붙어 있었다.
지금 이 물줄기를 따라 걸으면 낮은 처마와 통유리창이 번갈아 나타난다. 개조한 한옥 옆으로 새로 낸 카페 창이 붙어 있고, 그 사이로 물 흐르는 소리가 낮게 깔린다. 그러나 이 풍경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름값을 하듯 제민천은 예로부터 사람이 건널 다리를 필요로 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에 웅진교를 가설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지금의 대통교 자리로 짐작된다. 조선 순조 17년인 1817년에는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졌다. 백성에게 따로 비용을 거둘 수 없어 비변사에 보고를 올렸고, 충청수영의 군자미와 부여·연기의 공전을 그러모아서야 이듬해 4월에 복구를 마쳤다. 다리 하나를 고치는 데도 여러 고을의 살림이 오간 셈이다.
돌기둥 하나가 버틴 시간
반죽동에는 그보다 더 오래 이 자리를 지켜온 돌기둥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당간지주로, 1963년 보물 제150호로 지정됐다. 백제 사찰 대통사의 옛터에 남은 이 유물은 화강암 재질에 높이가 329센티미터에 이른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받침돌과 한쪽 기둥 아래가 크게 상했는데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금도 서 있다.

조금 더 걸으면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이 나온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고쳐 2014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문학관 인근 제민천변에는 그의 시와 시화가 곳곳에 걸린 나태주 골목길이 조성돼 있다. 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통일신라의 돌기둥과 근대 가옥, 그리고 지금의 시가 나란히 서 있는 셈이다.
상권이 빠져나간 자리
그러나 이 길이 줄곧 사람을 불러 모은 것은 아니다. 공주의 상권은 오래전에 신관동으로 옮겨 갔다. 시외버스터미널과 번영로, 대학로 일대에 상가가 밀집하면서 반죽동을 포함한 원도심은 상대적으로 한산해졌다. 낡은 한옥과 적산가옥들이 빈집으로 남아 골목 곳곳에 서 있던 시절이 길었다.
이 골목에 다시 불이 켜지기 시작한 건 한 사람의 우연한 발견에서였다. 경기관광공사에서 15년을 일한 권오상은 2015년, 아내의 고향인 공주 제민천 인근에서 낡은 한옥 한 채를 만났다. 2018년에는 제민천 서쪽 봉황동에 그 한옥을 고쳐 게스트하우스 봉황재를 열었다.

이후 그는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참여했고, 2019년 9월 마을경험디자인기업 퍼즐랩을 세웠다. 퍼즐랩은 청년마을 자유도와 마을스테이 제민천을 운영하며 이 원도심에 청년들이 머물 공간과 커뮤니티를 하나씩 만들어 왔다. 2018년 무렵부터는 서울 등 외지 청년들이 제민천을 따라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오래 비어 있던 한옥과 적산가옥에 카페와 책방 간판이 걸리는 일이 잦아졌다.
제민천이라는 이름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에서 나왔다지만, 정작 이 하천이 오래도록 구하지 못한 것은 이 골목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다리가 무너지면 여러 고을이 힘을 보태 다시 놓았듯, 이번에는 몇 사람의 발걸음이 빈집에 다시 불을 놓았다. 당간지주가 천 년 넘게 서 있던 그 자리 근처에서, 지금은 막 문을 연 카페의 조명이 저녁마다 켜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