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소제동 골목) 바람이 대나무를 지날 때
이른 아침 담쟁이 골목부터 늦은 밤 지붕 아래 불빛까지, 소제동을 걷는 하루의 공기를 따라가 본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2.12
- 골목
- 대전 소제동 골목

이른 아침의 소제동은 발소리부터 다르다. 보도블록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는데, 오가는 사람이 적어서다.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담쟁이가 시멘트 블록을 타고 올라 있는 자리를 자주 만난다.
어느 집 대문은 녹이 슬어 붉은빛과 갈색이 섞여 있다. 문패 대신 걸린 파란 번지판이 골목의 번호를 알려 준다. 문 위로는 담쟁이 넝쿨이 지붕까지 넘어가 있고, 그 안쪽 집이 지금 사람이 사는 곳인지 아닌지는 대문만 보고는 알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 벽을 보면 시멘트 틈으로 붉은 벽돌이 비친다. 오래전 벽이 덧발린 시멘트 아래서 조금씩 드러난 것이다. 그 틈을 따라 마른 넝쿨이 가늘게 뻗어 있다. 손을 대면 거친 시멘트와 매끄러운 넝쿨 줄기가 번갈아 만져진다.
조금 더 걸으면 대나무를 심어 둔 담장이 나온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댓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른 소리를 낸다. 그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볕이 초록빛으로 걸러져 바닥에 얼룩진다.

이름을 마주치는 순간
골목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낡은 기와지붕에 담쟁이를 두른 건물이 나온다. 나무 데크 위에 놓인 파란 안내판이 이곳이 지금은 식당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지붕은 여전히 옛 기와인데, 그 아래 붙은 간판의 글자는 새것이다.
데크에 서서 잠시 걸음을 멈추면 안쪽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말소리가 섞여 나온다. 담쟁이 잎이 처마 끝을 살짝 가려서, 소리가 먼저 나오고 사람은 그다음에 보인다.
조금 더 가면 시멘트 벽에 붙은 작은 명패 하나를 만난다. 이름 석 자가 새겨진 그 앞에 나뭇가지 하나가 드리워 있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리며 이름의 절반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 준다. 대나무 숲 안쪽에서 스며드는 볕이 그 명패 위로 얼룩진 그림자를 만든다.
이 골목에서는 이런 이름들을 여러 번 마주친다. 어떤 이름은 오래되었고 어떤 이름은 최근에 붙었는데, 벽과 지붕이 워낙 낡아 있어 둘을 눈으로 가르기가 쉽지 않다. 새 이름도 이 벽 앞에서는 금세 옛것의 낯빛을 얻는다.

골목 한쪽 카페를 나서면 강아지 몇 마리가 몰려다니는 걸 마주칠 때도 있다. 동네에서 함께 지내는 녀석들인지, 사람을 봐도 크게 놀라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사람과 개가 같은 보폭으로 좁은 길을 나눠 쓴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골목의 공기가 다시 바뀐다. 이른 아침의 발소리 대신 낮은 말소리와 걸음이 뒤섞인다. 카페 문이 하나씩 열리고, 담장 안쪽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원두 볶는 냄새가 잠깐 골목으로 흘러나온다. 몇 걸음 지나면 그 냄새는 곧 옅어지고, 다음 집 앞에서는 또 다른 냄새가 기다린다.
어느 집 철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끼익 소리를 낸다.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소리가, 이 골목이 아직 낡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 준다.
밤이 오면 지붕 아래 불이 켜진다
해가 지면 골목의 공기가 바뀐다. 낮 동안 조용하던 기와지붕 아래로 하나둘 조명이 들어온다. 처마 밑에 걸린 전구가 노란빛을 내리며 벽을 비춘다.
담장에는 부엉이와 토끼를 그린 벽화가 있고, 그 위로 소제동의 밤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낮에 지나칠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그림이 조명 아래서는 또렷하게 살아난다. 지붕 끝에 매달린 전구 줄이 담장의 경계를 따라 이어진다.

낮의 소제동이 발소리와 담쟁이의 골목이라면, 밤의 소제동은 처마 밑 불빛과 벽화의 골목이다. 같은 담장, 같은 지붕인데 빛이 닿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하루 동안 이 골목을 두 번 걸으면 두 개의 동네를 다녀온 기분이 든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 안쪽은 여전히 어둡다. 그 어둠 속에서도 담쟁이 넝쿨의 실루엣은 담장 위로 그대로 드러난다. 밝음과 어둠이 한 골목 안에서 나란히 자리를 나눠 가진다.
벽화 앞에 서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도 결국 하나둘 떠나고, 골목에는 다시 발소리만 남는다. 조명은 꺼지지 않은 채로 아무도 없는 담장을 비춘다. 그 불빛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골목 스스로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사의 지붕들은 백 년 가까이 이 골목의 낮과 밤을 번갈아 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골목을 걷는 사람들이 마주치는 것은 그 오랜 반복 위에 잠깐 머물다 가는 하루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