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육림고개) 고개를 오르는 숨
중앙시장에서 육림고개로 넘어가는 길은 평평하지 않다. 숨이 살짝 가빠질 때쯤, 간판들이 하나씩 말을 걸어온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10.05
- 골목
- 춘천 육림고개

중앙시장 쪽에서 이 고개로 들어서면 길이 먼저 몸으로 느껴진다. 평지가 아니라 언덕이다. 걸음이 자연히 느려지고, 숨이 조금씩 가빠진다. 가파른 언덕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바쁜 마음도 저절로 누그러진다. 극장을 보러 가던 사람들도, 중앙시장으로 물건을 지고 넘어가던 사람들도 다 이 경사를 밟았을 것이다. 고개라는 이름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오르막 중턱부터 간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레트로한 느낌의 낡은 건물 외벽 사이로, 새로 칠한 듯한 알록달록한 간판들이 섞여 있다. 어떤 가게는 오래된 벽돌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만 이름을 새로 걸었고, 어떤 가게는 타일 색까지 통째로 바꿔 자기만의 분위기를 냈다. 세월이 묻은 벽과 갓 칠한 페인트가 한 프레임 안에 나란히 있는 것이 이 고개의 흔한 풍경이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걸으며 작은 가게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이 고개의 핵심이다. 보라색 차양을 내건 타로 가게 유리창 너머로 말린 꽃과 수정이 걸려 있고, 몇 걸음 옆에는 나무 간판을 단 작은 식당이 칠판에 오늘의 영업시간을 적어 세워 두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지 않아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꾸민 입구만으로도 이 거리가 아직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느 찻집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공기가 기다리고 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나무 약장이 그 집의 정체를 말해준다. 한약방에서 쓰던 약재 서랍장을 그대로 들여와 벽면으로 세운 자리다. 서랍마다 새겨진 한자가 빼곡하고, 그 앞에 좌식 테이블과 방석이 놓여 있다. 커피를 파는 가게에서 한약방 냄새가 날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이 공간은 두 가지 시간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조금 더 걸으면 작은 식당 하나가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성모상과 교황의 사진이 나란히 놓인 선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헬로키티 인형과 체크무늬 커튼이 걸려 있고, 구석에는 마셜 스피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종교적인 소품과 귀여운 캐릭터 인형, 손때 묻은 가구가 한 공간에 뒤섞여 있는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주인이 오래 쌓아온 취향이 벽 하나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느낌이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고개를 내려오면 공기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낮 동안 데워졌던 벽돌이 식어가는 냄새, 하나둘 켜지는 가게 조명, 그리고 하루를 정리하는 셔터 소리. 레트로 감성과 청년들의 열정이 공존한다는 말은 멀리서 들으면 홍보 문구처럼 들리지만, 직접 이 경사를 걸어본 사람에게는 그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다. 늙은 벽과 젊은 간판이 같은 햇빛 아래 서 있다.

골목을 빠져나오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 낮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면서 간판의 색이 더 또렷해진다. 창 너머로 보이는 손님들의 실루엣, 그 사이를 오가는 주인의 움직임. 멀리서는 그저 알록달록한 거리로만 보이던 곳이, 가까이 서면 저마다 다른 속도로 하루를 마감하는 가게들의 모임이라는 게 느껴진다.
다시 중앙시장 쪽으로 걸음을 돌리며 생각한다.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숨을 고른다. 누군가는 극장을 보러, 누군가는 수제 에이드 한 잔을 마시러, 누군가는 그저 오래된 골목이 궁금해서. 이유는 달라도 다들 한 번쯤 이 경사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어쩌면 이 고개가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한 번은 숨을 고르게 만드는 그 가파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