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바늘은 멈추지 않는데, 골목은 멈췄다
종묘 앞 좁은 골목에서 1960년대부터 사과박스 위에 시계를 진열하던 이들이 있었다. 한때 300개가 넘는 점포가 빼곡했던 시계 부품과 수리 전문거리. 그 골목이 왜 지금 이 모습이 됐는지 알려면, 시간의 반대편을 봐야 한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9.08
- 골목
- 예지동 시계골목



청계천 상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올 무렵, 누군가 사과박스를 꺼냈다. 그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다. 이북민 출신 기술자들이 수리와 판매를 겸하는 점포들을 열었고, 소문을 타고 모여든 상인들 덕분에 이 좁은 골목은 금방 북적이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 안에 사과박스가 다닥다닥 늘어서 있던 그 시절 풍경은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리어카가 겨우 지나갈 만한 폭의 골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손님을 부르는 소리와 흥정하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시계 하나를 사기 위해 여러 점포를 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1974년이 되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예지상가가 문을 열었다. 이제 종로 시계골목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호황의 시절에는 300개가 넘는 점포들이 이 골목을 꽉 채웠고, 특히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는 혼수용품을 준비하러 오는 신혼부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예지상가가 들어선 뒤로는 골목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낱개로 흩어져 있던 점포들이 한 건물 안에 층층이 모였고, 그 안에서 다시 부품 전문, 수리 전문, 판매 전문으로 나뉘었다. 한 건물 안에서 시계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여러 손을 거쳐야 했던 구조다.
그때는 시계도, 귀금속도, 부품도, 그것들을 고치는 솜씨도 모두 이곳에 있었다. 무엇을 원하든 이 골목 몇 걸음 안에서 다 찾을 수 있었다. 시계 하나를 고치는 데도 숙련공의 손이 필요했고, 그 손은 스무 해, 서른 해를 이어 받으면서 더 깊어졌다.
손님이 원하는 시계를 찾아주는 것도, 고장 난 부품을 알아보는 것도 결국 사람의 감으로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부품 번호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랜 경험만이 이 골목에서 통하는 유일한 자격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불어닥쳤을 때, 시계와 귀금속 판매는 서서히 백화점으로 몰렸다. 그 후 쇠퇴가 눈에 띄기 시작했고, 2006년이 되자 세운상가 일대가 재개발 지구로 묶이게 되었다. 종묘 앞이라는 위치도 더 이상 메리트가 아니었다. 관광객들도 줄고, 시계를 고쳐주는 것보다 새 시계를 사는 것이 더 싼 시대가 되었을 때, 이 골목은 선택받지 못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외환위기 이후 문을 닫는 점포가 하나둘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남은 상인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어제까지 옆에서 장사하던 사람이 오늘 짐을 싸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반복됐다. 그렇게 골목의 밀도는 조금씩 옅어져 갔다.
남은 상인들은 그 시기를 두고 다들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손님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몸에 밴 손기술 말고는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정되고 십 년이 흘렀고, 또 십 년이 흘렀다. 재개발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와중에, 시계방 문은 차근차근 닫혀갔다. 간판을 떼어낸 자리는 비워졌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그 자리에는 지금, 40년 이상 시계를 고쳐온 숙련공들만 남아있다.
간판을 떼어낸 자리마다 다른 흔적이 남았다. 셔터가 아예 굳게 닫힌 곳도 있고, 먼지 쌓인 진열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지나는 사람들은 그 빈 자리를 눈여겨보지 않지만, 오래 이 골목을 지켜온 이들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익숙한 얼굴들이 사라진 자리다.
지금 예지동 시계골목에 남은 사람들은 40년, 50년을 같은 자리에서 시계를 고쳐온 장인들이다. 손가락 끝에만 남은 기술, 제자를 받을 나이는 이미 지났고, 함께 그 일을 해줄 젊은이도 찾아온 지 오래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이미 배운 기술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들어오는 손님을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것뿐이다.
장인들이 쓰는 도구들은 대개 손에 익어 반질반질하다. 새 도구를 사기보다 오래 쓴 것을 고쳐가며 쓰는 편을 택한다. 돋보기 안경, 핀셋, 작은 드라이버들이 놓인 작업대 위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앉아 있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움직인다. 건전지 하나 교체하는 데 5,000원이면 충분한 이 골목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날도 있지만 한 번 들어오는 손님은 십 년을 믿고 찾아온다. 시계바늘은 멈추지 않는데, 이 골목만큼은 어느 새 시간이 멈춰버렸다. 혹은 이 골목의 시간만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부의 변화와 상관없이, 예지동은 여전히 시계 수리점의 골목으로만 남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골목을 신뢰한다. 인터넷 후기보다 오래 다닌 단골의 말 한마디를 더 믿는다. 시계 하나를 맡기면서 몇 마디 안부를 묻고 가는 손님도 있다. 그 짧은 대화가 이 골목에서는 여전히 거래의 일부다.
해방 전만 해도 이 자리는 동대문 상권의 곁에 자리한 조용한 주거공간이었다. 학문과 예절을 뜻하는 예(禮)와 지(智)라는 글자로 이름 지어진 동네였다. 한국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밀수품과 중고품을 거래하는 암시장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렇게 70년을 거쳐 지금의 시계골목 모습에 이르렀다.
학문과 예절을 뜻하던 그 시절 조용한 동네의 흔적은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동네 이름 안에만, 그때의 글자 두 개가 여전히 남아 있을 뿐이다. 시계 소리로 가득한 지금의 골목과 그 조용했던 이름 사이의 거리가 이 동네가 겪어온 변화의 폭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예지동 시계골목은 종로청계관광특구에 포함되어 있다. 광장시장과 방산시장, 세운상가, 종로 귀금속거리와 함께 종로 일대의 전통 상권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찾는 것은 과거의 영광이지, 지금의 현실은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 속에서, 예지동만은 여전히 시계 수리 장인들의 터전으로 남아 있다.
예지동을 스쳐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골목이 한때 전국에서 손꼽히던 상권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나간다. 낡은 간판과 좁은 통로만 보고는 그 시절의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남은 장인들의 손끝에는 그 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예지동 시계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목적으로 이 근처를 찾았다가 우연히 골목 입구를 발견한다. 몇몇은 발걸음을 멈추고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몇몇은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한 번 안으로 들어와 시계를 맡겨본 사람은 대개 다시 이 골목을 찾는다. 손끝이 만든 신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지동 시계골목을 다녀간 사람들이 공통으로 남기는 말이 있다. 이렇게 오래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조용한 골목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낯설다는 것이다. 화려한 간판 하나 없이도, 이 골목은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붙잡고 있다.
언젠가 이 골목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오늘도 어느 작업대 위에서는 시계 하나가 분해되고, 다시 조립되고 있다. 그 반복이 이어지는 한, 예지동은 여전히 시계골목이라는 이름을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