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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돌에서 천으로, 손에서 손으로

서울을 지은 화강암이 나온 채석장 자리에, 이제 사람들이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한다. 흙에서 나온 것과 손으로 만든 것 사이의 긴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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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9.08
골목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SCENE 01 : 돌과 천이 만나는 동네

창신동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4년 행정구역을 다시 그릴 때, 인창방에서 '창'을, 숭신방에서 '신'을 따서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 두 동네의 이름을 반반씩 섞어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동네의 진짜 이름은 그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창신동과 옆 숭인동 일대는 채석장이었다. 서울을 지을 때 필요한 화강암을 캐내던 자리였다. 1924년에는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지정될 만큼 그 규모가 컸다. 여기서 캐낸 돌로 한국은행 건물을 세웠고, 서울역을 지었고,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도시는 그 도시를 지은 손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 어떤 돌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건물만 남고 채석장은 잊혀진다. 하지만 창신동은 다르다. 이 동네의 땅 위에는 채석장이 만든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절개지가 만든 언덕

돌을 계속 캐내다 보면 깎아지른 절벽이 생긴다. 창신동의 가파른 언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채석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지형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지난 뒤, 그 절개지 옆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땅이 없는 사람들이 경사진 땅에 토막집을 짓고 사는 일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가 되면서 이 동네는 달라졌다. 작은 규모의 봉제공장들이 수없이 들어섰다. 왜 하필 창신동이었을까. 아마도 싼 임차료와 나쁘지 않은 교통이라는 단순한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들어온 공장들은 오래 머물렀다. 1970년대에는 삼천여 개의 봉제공장이 이 동네를 메웠다고 한다.

SCENE 02 : 절개지 전망대에서 본 현재

손으로 만드는 일이 들어온 자리

동대문의 의류 산업이 번성할 때, 창신동은 그 산업의 심장이었다. 원단을 자르고, 바느질하고, 마무리하는 모든 일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가늘고 손가락만 한 바늘이 수도 없이 오가며 옷을 만들어 냈다. 서울의 옷장을 채운 것이 창신동의 손이었다.

채석장에서는 신체의 무게를 실어 돌을 캤다면, 봉제공장에서는 신체의 소세움을 필요로 했다. 같은 땅 위에서, 한 세대 차이로 완전히 다른 일이 이루어졌다. 돌에서 천으로. 채석의 손에서 바느질의 손으로. 창신동은 서울을 짓는 과정 자체를 몸으로 겪어낸 동네다.

지금 이 동네에는 천여 개의 봉제공장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의 삼분의 일도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아침을 열고 바늘을 들고, 옷을 만들고 있다.

SCENE 03 : 마주보는 두 손의 기억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창신동은 공장 노동의 흥성기와 쇠퇴기를 동시에 담고 있다. 산업이 떠났을 때도 있고, 사람이 떠났을 때도 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작아질 뿐이었다.

이제 이 동네는 또 다른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옷을 만드는 손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문구와 완구가 들어오고 있다. 동대문의 산업이 바뀌고 있고, 창신동도 함께 바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만드는 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창신동의 지명 유래와 채석장, 봉제공장의 역사는 공개된 행정 자료와 지역 기록에 따른 것이다. 채석장에서 케낸 화강암이 사용된 건물들과 봉제공장의 규모는 역사 자료에 따른 것이다. 동네의 현재 모습과 남은 공장의 활동은 2026년 여름과 초가을에 확인한 방문 기록에서 반복해 나타난 서술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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