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특구가 만든 거리
명동은 500년을 한 자리에서 살아온 동네가 아니다. 조선부터 일제를 거쳐 해방, 고도 성장, 글로벌 시대까지 시대마다 몸을 바꾼다. 재미로도 마찬가지다. 2000년 관광특구 지정 이후, 그 이름이 붙은 지 불과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이 골목은 지금, 전 세계에서 온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9.08
- 골목
- 명동 재미로

명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명례방에서 시작됐다. 예(禮)가 밝다는 뜻의 그 지명이 지금까지 쓰인다면, 그 예는 어디로 갔을까. 명(明)만 남은 서울의 이 자리는 시대의 무게를 가장 빨리 감지하는 곳이다. 때로는 앞서갔고, 때로는 뒤처졌다. 하지만 멈춘 적은 없었다.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명례방이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명(明)이라는 한 글자는 살아남아 오늘의 지명을 지탱한다. 이름은 변하지 않아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 명동이라는 두 글자 아래 얼마나 많은 얼굴이 겹쳐 있는지, 그 지명을 발음하는 순간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명치정(明治町)이 된 명동은 해방 후 서울의 문화예술 중심지였다. 영화인, 문인, 연극인들이 모여드는 동안 이 골목은 창작의 근거지였다. 그 가운데서 극장과 영화관들이 들어섰고, 한국 영화사의 장면들이 이 거리에서 펼쳐졌다. 명동은 그때 가장 빛나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명동의 다방과 술집에는 예술가들의 자리가 따로 있다시피 했다. 시인은 마감을 앞두고 원고지를 붙잡았고, 배우는 다음 촬영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좁은 골목 하나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몰려 있던 시절은 흔치 않다. 지금 그 골목을 걷는 사람들은 그런 밀도를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명동의 공기는 원래 그런 밀도로 채워져 있었다.
1960년대 재개발 이후 명동은 변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서울에서 가장 먼저 유행이 닿는 거리였다. 패션, 유행, 쇼핑. 서울이 자본의 시대로 진입할 때 명동은 그 시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백화점이 들어서고, 골목골목이 상품으로 채워졌다.
그 시절 명동을 걷던 사람들은 자신이 유행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새로 생긴 백화점 쇼윈도 앞에 사람들이 멈춰 섰고, 골목 안쪽 작은 옷가게들도 저마다의 손님을 붙잡았다. 상권이라는 말이 아직 낯설던 시절에도, 명동은 이미 서울에서 가장 촘촘하게 짜인 상업 지구였다. 그 촘촘함이 나중에 관광특구라는 제도적 이름을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
2000년 3월 30일, 명동은 관광특구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한 번 더 확대 지정되었다. 그 지정은 단순한 행정 결정이 아니었다. 이후 명동의 모든 것이 그 결정을 중심으로 재편성됐다. 임대료가 뛰었고, 토착 상인들이 떠났다. 들어선 것은 글로벌 브랜드들과 관광객을 향한 가게들이었다. 명동은 더 이상 서울의 거리가 아니라 세계의 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토착 상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몇 대를 이어온 가게의 간판이 내려가고, 그 자리에 낯선 브랜드의 로고가 걸렸다. 떠난 이들의 사정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치솟은 임대료 앞에서는 오랜 단골도, 손에 익은 솜씨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는 것. 거리의 주인이 바뀌는 방식은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빠르다.
2017년이 되자 서울시는 만화의 거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명동의 한 구간에 벽화를 그리고, 거리에 예술가를 불러들이는 프로젝트였다. 2021년에는 리드로우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약 450미터의 거리가 인스타그램 세대의 눈 높이에 맞춰진 미학으로 치장된 것이다. 벽의 높이는 뜻하지 않게 하늘을 가렸다.
영화관들은 사라졌다. 명보극장은 2008년 문을 닫고 명보아트홀로 다시 태어났다. 중앙시네마는 2010년 폐관했다. 2025년에는 CGV 명동역도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영화의 거리는 만화의 거리가 되었고, 만화의 거리는 포토존의 거리가 됐다. 정체성의 변화는 이제 거리의 성격 자체를 바꿨다.
오늘 재미로에 들어서면 그 사라짐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벽마다 색이 입혀져 있고, 그 색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쉼 없이 카메라를 든다. 극장이 있던 자리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을 것이다. 거리는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표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평일과 주말의 재미로는 또 다르다. 평일 낮에는 그나마 여유가 있어 벽화를 찬찬히 볼 수 있지만, 주말이 되면 사람의 물결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관광특구라는 이름은 이럴 때 가장 뚜렷하게 실감된다. 이 좁은 골목 하나가 감당하는 발걸음의 무게가, 지정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양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나가고, 캐리어를 끄는 여행객이 지나가고, 손을 잡은 연인이 지나간다. 언어도 다양하다.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영어가 뒤섞여 들린다. 벽화 하나를 두고 여러 언어로 감탄사가 터진다. 그 소리들이 겹쳐질 때, 재미로는 비로소 관광특구라는 이름에 걸맞은 거리가 된다.
나이 든 세대에게 명동은 여전히 그 시절의 냄새를 간직한 곳이다. 첫 데이트를 했던 다방의 위치를 지금도 정확히 짚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건물은 이미 몇 번이고 새로 지어졌다. 기억과 실재가 어긋나는 지점에서, 명동을 오래 알아온 사람들은 조용히 발걸음을 늦춘다.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명동은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2019년 3분기 21만 3,861명이 이곳을 거쳐 가던 발걸음이 2020년 3분기 14만 1,374명으로 떨어졌다. 33.9%의 붕괴였다. 공실률은 8.8%에서 47.2%로 치솟았다. 관광특구라는 이름 앞에서 관광이 멈추자 명동도 멈춰버렸다. 그 침묵은 길었다.
그러나 서울이 다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자 명동도 변했다. 2022년 94만 명이던 외국인 관광객이 2023년 977만 명으로 늘었다. 10배의 증가였다. 공실률은 43.3%에서 2.4%로 떨어졌고, 상권의 매출도 2019년 12월 수준으로 회복했다. 명동은 다시 세계의 거리가 되었다. 이번에는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이 회복의 속도는 명동이라는 거리가 가진 특유의 유연함을 보여준다. 위기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다시 채워지는 힘. 그 힘은 특정한 상인이나 건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거리 자체가 지닌 자리의 성격에서 나온다. 궁궐과 시장 사이, 도심의 한복판이라는 자리는 어떤 시대에도 사람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관광특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거리가 저절로 관광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름 뒤에는 임대료 협상이 있었고, 업종을 바꾼 결정들이 있었고, 새로운 간판을 올리기까지의 망설임이 있었다. 명동은 그 모든 개별의 선택이 쌓여 지금의 얼굴을 갖췄다. 위에서 그은 선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발걸음과 결정이 겹쳐 만든 무늬에 가깝다.
재미로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다. 지정(指定)에 의해 탄생하고, 프로젝트에 의해 그려지고, 위기에 흔들렸다가, 글로벌의 발걸음으로 다시 채워진 곳. 지은이 없는 거리, 또는 지은이가 계속 바뀌는 거리라고 해야 할까. 명동의 모든 변화가 축약된 바로 그곳에서, 오늘도 누군가는 셀카를 찍고, 누군가는 밤을 새운다. 그리고 그 발걸음들이, 명동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