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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광희문 자리에서 실크로드가 깨어났다

조선 도성의 문이 섰던 자리에서, 백 년이 지나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동쪽 끝 광희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골목 전체가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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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9.08
골목
광희동 중앙아시아거리
광희문 자리에서 실크로드가 깨어났다

광희동이라는 이름은 한 장소의 역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에서 유래했다. 광희문의 이름은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는 뜻의 한자에서 왔으니, 서울의 지명 중에서도 빛이 직접 들어가 있는 드문 이름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나와 큰길을 건너면, 아직은 여느 서울 도심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가 바뀐다. 간판의 글자가 낯설어지고, 스쳐 지나가는 대화의 억양이 달라진다. 그 전환은 매우 짧은 거리 안에서 일어난다.

SCENE 01 : 거리의 언어가 바뀌는 지점
▲ 2026.05 / 사진 sumiq7208 · https://blog.naver.com/sumiq7208/224271286578 sumiq7208이 촬영한 광희동 중앙아시아거리의 거리 풍경입니다. 간판의 키릴문자와 이국적인 분위기가 골목 전체를 지배하며, 한 걸음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서울에서 해외로 떠난 기분이 든다는 이곳의 매력을 담았습니다.

지금 이 거리를 걷는 이들은 대부분 그 이름의 유래를 모른 채 지나간다. 몽골식 만두 냄새와 러시아어 간판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이 골목이 한때 도성의 정문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쉽게 잊힌다. 하지만 이름은 여전히 남아, 그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붙들고 있다.

그 문은 1396년 한양도성이 축조될 때 함께 세워졌다. 병사들을 사열하는 통로였고, 때로는 서울의 장례 행렬이 나가던 길이었다. 이름은 밝지만 용도는 무겁고 엄숙했다.

성문을 드나들던 이들 가운데는 시신을 운구하는 상여 행렬이 유독 잦았다고 전해진다. 도성 안에서 죽은 이를 성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밝은 이름과 무거운 쓰임이 한 문 안에 함께 있었던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광희문의 문루는 철거되었다. 도로를 넓힌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도성의 순환을 끊는 일이었다. 홍예만 남겨진 그 자리는 해방 뒤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75년이 되어서야 복원을 시작했다. 복원할 때는 원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열 미터쯤 옮겨졌다.

문루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랫동안 휑한 공터만 남아 있었다. 지나던 이들은 그곳에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 스쳐갔다. 이름만 남고 실체는 사라진 시간이 오래 이어졌다.

그 사이 광희동은 조용했다. 골목만 남고 문은 없었다. 통행자들은 필요한 물건을 사러 광희동에 들어왔고, 필요가 없으면 이 자리를 지나쳤다.

그 시절의 광희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문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평범한 주택가와 몇몇 오래된 상점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서울의 여느 골목과 다르지 않았다. 그 평범함이 훗날 완전히 다른 얼굴로 뒤바뀔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런드리 라인에서 실크로드로

1990년대 초반, 세상이 다시 열렸다.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으면서 러시아 상인들이 동대문 의류상가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옷감과 숙박, 환전소였다. 광희동은 그 모든 것을 팔고 환전해줄 수 있는 장소였다.

당시 이 골목에 문을 연 상점들은 대부분 작고 소박했다. 환전과 숙박, 간단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였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면서, 골목은 조금씩 몸집을 키워갔다. 필요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다시 필요를 불러들이는 순환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저환율을 타고 보따리상들은 더 많아졌다. 러시아 상인과 우즈벡, 몽골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까지 들어왔다. 골목은 바뀌었다.

하지만 1998년, 러시아는 경제 위기에 빠졌다. 모라토리엄이 선언되었고, 러시아인들은 떠났다. 자리는 비웠지만 물음표는 남아 있었다. 이 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

러시아인들이 떠난 자리는 한동안 어수선했다. 문 닫은 상점과 비어 있는 공간들이 골목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이 다음 물결이었다. 언어도 얼굴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물려받았다. 2001년, 뉴금호타워라는 건물이 완공되었다. 건물의 열 층 전체가 몽골인들의 미용실과 환전소, 식당으로 채워졌다. 사람들은 뉴금호타워를 몽골타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사람들도 골목의 음식점과 식료품점을 열었다. 단순한 거래의 거점에서 생활 거점으로, 동대문 상권의 주변부에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공간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제 이 골목에서 옷감을 흥정하는 소리는 듣기 힘들다. 대신 화덕에서 빵을 굽는 소리와, 고기를 재는 손길이 만드는 소리가 그 자리를 채운다. 상품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거래의 방식과 관계의 결도 함께 바뀐 셈이다.

러시아의 보따리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또 다른 실크로드가 깨어났다. 이번엔 옷감이 아니라 음식의 맛이 건너왔다. 타슈켄트의 플로프 냄새, 울란바토르의 양고기 고수의 열기가 동대문의 좁은 골목을 채웠다.

저녁이 되면 이 골목의 표정은 또 한 번 바뀐다. 하루 장사를 마친 상인들이 서로의 언어로 인사를 나누고, 가게 앞 평상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국적도 사연도 제각각인 이들이 같은 골목 안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풍경은, 오래전 이 자리를 오가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광희동에 들어서면 한글보다 키릴문자가 더 많이 눈에 띤다. 환전소 간판이 여러 언어로 쓰여 있고, 환성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각국의 전통 카펫 문양이 수놓여 있다. 백 년 전 광희문이 막힐 때 닫혔던 길이, 이제 반대 방향으로 열려 있다.

지금도 이 골목의 상점 주인들 가운데는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킨 이들이 있다. 그들은 골목의 언어가 바뀌고 간판이 바뀌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산증인들이다. 새로 온 이웃들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는 것도, 대개 그들의 몫이다.

골목을 오가는 이들의 국적은 다양하지만,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낯선 얼굴에게도 먼저 눈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 인사만으로 이 골목에서는 충분히 통한다.

오래된 사진 몇 장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화려한 간판 이전에 훨씬 단출했던 골목의 모습이 보인다. 몇몇 상점만 드문드문 서 있던 자리에, 지금은 촘촘히 간판이 걸려 있다. 그 밀도의 차이가 이 골목이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그 오래된 골목이 지금처럼 활기를 띠게 된 데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버텨온 사람들의 몫이 크다. 상권이 뜨고 지는 부침 속에서도, 이들은 자리를 지키며 다음 세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왔다. 광희동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것은 결국 그런 끈질긴 생활의 축적이다.

이 골목을 스쳐 가는 관광객들도 점점 그 사정을 알아가는 눈치다. 단순히 이국적인 사진 배경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걸음도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그런 태도의 변화 역시 이 거리가 만들어낸 작은 성과일 것이다.

조선 도성의 소문 자리에서, 이제 다시 문이 열린 것이다. 빛이 멀리 사방을 밝힌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곳에서, 이번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들어 마시는 따뜻한 음료의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광희문 자리에서 벌어진 세 번의 열고 닫힘. 조선 도성의 문이 막히고, 역사가 방치되고, 다시 다른 사람들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살고, 일하고, 밥을 짓고, 이웃과 인사를 나눈다. 광희동은 더 이상 텅 빈 역사가 아니라, 계속 누군가의 생활로 채워지는 현재의 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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