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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의 발자국이 돌담에 남다

1884년 러시아공사관이 들어섰던 자리에서 시작된 이 골목은, 구한말 외교의 중심지에서 근대 종교·교육의 요람으로 변모했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세기를 넘나드는 건축물들이 이 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켜왔는지를 말해준다.

alleymag.
발행
2026.09.08
골목
정동길
130년의 발자국이 돌담에 남다

정동길의 다른 이름은 '덕수궁 돌담길'이다. 돌담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름도 함께 남을 것이다. 길이 길로서 존재하려면 양옆에 무언가 서 있어야 하는데, 이 골목의 경우 그 무언가가 역사라는 점이 특별하다.

정동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은 크지 않다. 넓은 대로에서 슬쩍 꺾어 들어오는 좁은 길목이라, 처음 오는 사람은 자칫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몇 걸음만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다. 차 소리가 잦아들고, 돌담의 그림자가 발밑에 드리운다. 이 길은 스스로를 크게 알리지 않는다. 대신 걷는 사람에게 천천히 자신을 내보인다.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건축 기술자 사바틴의 설계로 구 러시아공사관 착공이 시작되었다. 1890년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은 이 길의 첫 근대 건축물이 되었다. 단순한 외교기관이 아니었다.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 임금이 이 건물에 피신하여 대한제국의 건설을 구상했던 자리이기도 했다.

고종의 발걸음이 머물렀던 사관이 이 길을 구성하는 첫 번째 축이라면, 종교는 두 번째 축을 이루었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래, 1895년 9월에 정동제일교회의 예배당 건축이 착공되었다. 1897년 12월 26일 봉헌식을 거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19세기 기독교 교회 건물이다. 100년이 넘은 건물이 원형 그대로 서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구 러시아공사관과 정동제일교회는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에 나란히 서 있다. 외교의 자리와 신앙의 자리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이 골목이 한 가지 성격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몇 걸음 옮기면 아펜젤러가 예배를 드렸던 자리가 나온다. 서로 다른 역사가 다투지 않고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SCENE 01 : 덕수궁의 그림자
▲ 2026.08 / 사진 koko021133 · choisy72 · https://blog.naver.com/koko021133/224384858078 / https://blog.naver.com/choisy72/224318174829 덕수궁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입니다. 작성자: koko021133, choisy72

이 길이 특별한 까닭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들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 구한말의 외교 공간, 근대의 종교·교육 기관, 그리고 지금의 일상이 한 길 위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 지어진 구 신아기념관(당시 신아일보사 별관)은 미국의 싱거 미싱 회사 한국지부로 쓰이다가,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정동 근대역사길은 총연장 2.6km의 공식 역사보행탐방로이다.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제학당, 환구단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고, 구한말 서구열강의 공사관·교육기관·종교시설이 들어서면서 근대문물의 중심지가 된 이 땅의 기억을 따라가는 경로이다.

이 길을 따라 놓인 배제학당과 환구단까지 함께 걸으면, 정동이 품고 있던 근대의 얼굴이 한층 또렷해진다. 교육을 위한 자리와 국가의 의례를 위한 자리가 외교와 종교의 자리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 한 골목 안에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공간이 모여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정동길이 단순한 산책로를 넘어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걷는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도, 마주치는 시대가 달라진다.

계절에 따라 이 길의 표정도 달라진다. 은행나무 잎이 초록으로 무성한 여름에는 돌담 위로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에는 같은 돌담이 훨씬 밝은 낯빛을 띤다. 겨울이 되어 가지가 앙상해져도 돌담과 건축물은 그대로 남아 골목의 뼈대를 지킨다. 나무는 계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지만, 돌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그 변화를 지켜본다.

걷는 사람이 남기는 흔적

이 골목을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낮에는 덕수궁을 돌아 나와 옛 돌담 따라 천천히 걷는 관광객의 발걸음이다. 역사를 '읽기' 위해서다. 밤이 되면 정동 갑도빌딩의 LP 바로 향하는 발걸음, 데이트 코스를 위해 정동길을 선택한 젊은 이들의 발걸음이 섞인다. 역사를 '느끼기' 위해서다.

낮 시간 이 길을 걷는 관광객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낮고 조심스럽다. 안내판의 글귀를 소리 내어 읽거나, 사진을 찍기 전 잠시 숨을 고르는 정도다. 반면 밤이 되어 들려오는 소리는 훨씬 편안하다. 웃음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LP 바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음악이 뒤섞인다. 같은 돌담을 사이에 두고, 하루에 두 번 다른 정서가 이 길을 채우는 셈이다.

정동 갑도빌딩의 LP 바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은 크지 않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온전히 들리는 정도의 소리다. 그 절제된 크기가 오히려 이 길의 밤과 잘 어울린다. 요란한 불빛이나 음악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대신, 골목의 정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낮 동안 역사를 읽으러 온 이들의 조용한 발걸음과 밤에 소리를 좇아온 이들의 걸음이, 결국 같은 절제 안에서 만난다.

가게들도 그런 발걸음에 응답해왔다. 새로 들어온 카페나 레스토랑들은 이 길의 근대 건축물과 돌담을 배경으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옛 건축물의 무게감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이 길 위에 이미 충분한 맥락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동길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골목이 되었다.

이 길에 자리 잡은 가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역사와 타협했다. 어떤 곳은 옛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살려 내부를 꾸몄고, 어떤 곳은 새 건물을 짓되 주변 돌담의 높이와 색을 존중했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이 길의 매력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거리를 좁혀 온 셈이다.

SCENE 02 : 근대와 현재의 겹침
▲ 2026.07 / 사진 btac228kc · ajeossilog · https://blog.naver.com/btac228kc/224336011399 / https://blog.naver.com/ajeossilog/224401587868 근대 건축물과 새로 들어선 가게들이 나란한 정동길 풍경입니다. 작성자: btac228kc, ajeossilog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한 골목에서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설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에 이른다. 급하게 헐고 다시 짓는 대신,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오래 고민한 흔적이 골목 곳곳에 배어 있다. 그 더딘 속도가 오늘의 정동길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길이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선택받는 이유는, 결국 손을 대지 않았던 것들 때문이다. 1897년 완공된 예배당의 종탑, 1890년 지어진 공사관 건물의 기단,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돌담과 은행나무 가로수. 이것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결정의 결과이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어도 헐고 새로 짓는 대신, 무언가를 지키기로 한 다정한 마음들이 겹겹이 있었던 것이다.

정동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골목이 낮과는 또 다른 얼굴로 서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하루 안에서도 이렇게 여러 번 표정을 바꾸는 길은 흔치 않다. 그 다채로움이야말로 이 길이 오래도록 사람을 불러들이는 이유일 것이다.

정동길은 서울 중구에 위치한 총연장 2.6km의 근대역사보행탐방로입니다. 1884년부터 1930년대에 걸쳐 지어진 건축물들과 이들을 연결하는 덕수궁 돌담길이 특징입니다. 구한말 외교와 근대 종교·교육 기관들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처 및 자료: 서울시청, 국가유산청, 정동제일교회 공식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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