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로 남겨진 만화의 부활
강풀의 순정만화 속 배경이 성내동 골목의 벽면으로 물질화했다. 2013년 시작된 도시재생 사업은 낙후된 주택가를 만화 거리로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 동네의 정체성이 되었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9.08
- 골목
- 강풀 만화거리



골목 초입에 서면 낮은 지붕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건물 사이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그대로 남은 동네라는 것을 그 지붕의 높이가 말해준다.
웹툰 작가 강풀은 강동구 출신이다. 그가 그린 순정만화들, 특히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같은 작품들의 배경이 되었던 거리가 성내동이다. 낮고 오래된 주택가 골목, 구멍가게, 버스 정류장 같은 일상의 무대들이 그의 만화 속 신인 것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만화 속 장면이 실제 풍경과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구멍가게, 버스 정류장, 낮은 담장 같은 것들이 그림이 되어 벽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강풀이 어린 시절 지나다녔을 법한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데 이 골목이 벽화 거리가 된 것은 강풀의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2013년, 강동구가 낙후된 주택가를 정비하기로 결심했을 때, 동네와 인연 깊은 작가의 작품을 활용해 보자는 제안이 나온 것이 시작이었다. 강풀은 이 제안을 수락했고, 재능을 기부하기로 했다.
동네와 인연 깊은 작가의 이름을 빌리기로 한 결정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닐 것이다. 낙후된 골목을 손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텐데, 그림을 택한 것은 결국 이 동네의 정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손을 믿었기 때문이다.
2013년, 어둡던 골목 벽면이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직접 골목을 돌며 사진을 찍고 콘티를 준비했다. 건물의 튀어나온 부분에, 배전함에, 낡은 계량기에, 현관의 손잡이에까지 만화를 그려 넣었다. 지역 주민들의 동의 속에서, 자원봉사자들과 미술 작가들의 협력으로 50여 점의 벽화가 성내동을 감쌌다.
작가가 손수 골목을 돌며 어느 벽에 어떤 장면을 그릴지 정했다는 사실은,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묘한 신뢰감을 준다. 아무렇게나 배치된 그림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를 가진 그림이라는 느낌이다. 배전함 하나, 계량기 하나도 허투루 남겨두지 않은 정성이 골목 곳곳에서 드러난다.


벽화 하나하나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골목을 걷다 보면 그 공들인 흔적만은 분명히 느껴진다. 성급하게 그려 넣은 그림이 아니라, 그 벽이 원래 있던 자리를 오래 들여다본 뒤에야 나올 수 있는 구도들이다.
천호역 6번 출구와 강동역 4번 출구 사이, 성내동 주택가 골목은 이제 단순한 주거 지역이 아니다. 바닥에 표시된 노란 별과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한 권의 만화를 한 장씩 넘기듯 벽화를 마주친다. 강풀이 골목에 남겨둔 것은 그림만이 아니다. '순정만화' 속 따뜻한 대사들, '바보' 속 다정한 장면들이 벽 위로 피어난다.
바닥의 표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골목 하나를 통째로 돌게 된다. 처음엔 벽화만 보였는데, 두 바퀴째부터는 골목의 생김새 자체가 눈에 들어온다. 낮은 담장과 좁은 어귀가 이 동네의 오랜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이 일반적인 벽화 거리와 다른 이유는 작가의 완성도 있는 재창작에 있다. 일반적인 벽화거리는 익숙한 패턴이나 고전적인 색채와 주제를 반복하지만, 강풀 만화거리는 다르다. 웹툰이라는 현대적 매체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골목의 지형과 구조를 그대로 살려 벽화를 배치했다. 건물의 튀어나온 부분, 배전함, 계량기, 현관의 손잡이까지 모든 공간이 만화의 일부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골목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읽게 만드는 구성이다.
낮은 담장과 좁은 골목이라는 조건은 벽화 작가에게 제약이자 기회였다. 넓고 평평한 벽을 찾기 어려운 대신, 튀어나온 모서리와 굽어진 담장이 오히려 장면에 입체감을 더했다. 걷는 방향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이는 것도 이 지형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다.
도시재생 사업이 만난 예술의 손길
예술과 행정이 만나는 지점은 대개 어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골목에서는 그 어색함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의 그림과 구청의 정비 계획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나란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강풀 만화거리는 전형적인 도시재생 사업의 성공적 모델이라 불린다. 낙후된 골목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살려내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벽돌담과 낮은 주택가의 풍경을 보존하면서 그 위에 예술을 입혔다.
낡은 것을 허물지 않는다는 선택은 눈앞의 효율만 따지면 손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새로 짓는 편이 빠르고 깔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골목은 느린 방식을 택했고, 그 느림이 결국 지금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만화 거리가 만들어진 뒤, 주변 골목에는 변화가 일었다. 감성적인 카페, 이색적인 맛집, 독립 공방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밤의 불빛이 골목을 밝히고, MZ세대의 발걸음이 이 거리를 다시 채웠다. 하지만 강풀 만화거리는 순수한 관광지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주민들이 거주하는 살아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밤의 골목은 조용해야 하고, 발걸음은 가벼워야 한다.
카페 창가에 앉아 있으면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벽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걸음, 익숙하게 지나치는 걸음이 뒤섞인다. 방문객과 주민이 같은 시간, 같은 골목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이 거리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바닥의 별 모양을 따라가다 보면 방향을 잃을 걱정이 없다. 그러나 가끔은 일부러 그 표시를 벗어나 옆 골목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해진 길 밖에서 마주치는 벽화가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강풀 만화거리를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개 40분에서 1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다. 이 거리는 작가의 재능기부, 지역 주민들의 동의, 자원봉사자들의 협력이 어떻게 하나의 공간을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낙후된 주택가가 문화 거리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의 추억이 누군가의 위로가 되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벌어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천천히 걷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 낮은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벽화, 계량기 뚜껑에 숨겨진 작은 그림, 골목 끝에서야 보이는 명대사까지. 서두르는 걸음으로는 이 골목이 준비해 둔 것의 절반도 만나지 못한다.
도시재생 사업이 성공하려면 '지우지 않기'라는 태도가 필요하다. 오래된 것을 보존하면서 그 속에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일이다. 강풀 만화거리는 성내동의 낡은 주택가를 헐어내지 않았다. 그 골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만화를 덧씌웠다. 공방과 도서관이라는 문화 공간도 함께 조성되어, 단순한 벽화 거리를 넘어 문화·감성 상권으로 확장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도시재생의 의미이고, 이 골목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따뜻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