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줄자를 들고 골목의 가로수와 보도블록을 재는가
눈대중 위에 눈금 하나가 놓이는 순간, 도시는 눈으로 훑던 풍경에서 몸으로 가늠하는 크기가 된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9.10

01. 손바닥에 남는 쇠의 무게
줄자는 작은 도구인데도 손에 쥐면 몸집에 비해 묵직하다. 케이스 안에는 얇은 강철 띠가 감겨 있고, 그 띠를 한 뼘쯤 뽑아 올리면 허공에서 뻣뻣하게 버티다가 어느 지점에서 힘을 잃고 꺾인다. 버팀과 꺾임이 손목으로 전해지는 감촉은 스마트폰 화면 위를 미끄러지는 손가락의 감촉과는 전혀 다르다. 화면은 손가락이 닿기만 해도 대답하지만, 줄자는 손이 힘을 줘야 대답하고 힘을 빼면 제자리로 돌아간다.
끝에 달린 쇠 걸쇠를 어딘가에 걸어야 재기가 시작된다. 그 걸쇠는 일부러 헐겁게 붙어 있어서, 모서리에 걸어 당길 때는 앞으로 나오고 벽에 밀어 붙일 때는 뒤로 들어가며 자기 두께만큼을 스스로 덜어 낸다. 걸 곳이 없으면 재는 일도 없어서, 줄자를 든 사람은 무언가의 가장자리를 찾아 다가가야 하고, 다가간 자리에서 무릎을 굽히거나 팔을 뻗어야 한다. 사진은 선 자리에서도 찍히지만 실측은 대상 곁까지 몸이 가야 성립한다. 눈금을 읽으려면 고개도 숙여야 하는데, 도시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일은 평소에 드물어서 처음에는 그 자세가 조금 어색하다.
눈금은 처음 보면 빽빽한 선의 행렬이고, 몇 번 읽다 보면 손가락이 눈보다 먼저 알아본다. 가장 긴 선에는 숫자가 붙어 있고 그 사이의 짧은 선들은 이름 없이 서 있으며, 짧은 선과 선 사이에는 줄자가 더 이상 나누지 않은 길이가 있다. 재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눈금이 나누는 데까지이고 그 아래는 늘 눈대중의 몫이라, 아무리 잘 재도 잰 것 안에 못 잰 부분이 조금은 남는다.
다 재고 나면 걸쇠에서 손을 뗄 차례다. 강철 띠가 케이스 안으로 촤르륵 감겨 들어가고, 걸쇠가 입구에 부딪히며 딸깍 하고 끝난다. 그 소리는 방금까지 열려 있던 거리가 닫히는 신호처럼 들린다. 눈금에 적힌 숫자는 수첩에 옮겨 적으면 되지만, 띠의 무게와 소리는 옮겨 적을 데가 없어서 손에만 남는다.

02. 눈대중과 눈금이 만나는 자리
골목이 좁다거나 넓다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 그날의 몸이 하는 말이다. 짐을 든 날의 골목은 유난히 좁고, 걸음이 가벼운 날의 같은 골목은 이상하게 트여 있다. 눈대중은 기억과 컨디션과 시간대가 한데 섞여서 나오고, 그 느낌은 나에게만 정직해서 옆 사람과 나란히 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눈금은 그 사이에 놓이는 공통의 말이다. 걸쇠를 담벼락에 걸고 띠를 끝까지 당기면, 내 기분이 넓다고 하든 좁다고 하든 눈금은 같은 자리에서 멈춘다. 이때 묘한 일이 생긴다. 재고 나면 숫자보다 눈대중이 어디서 어긋났는지가 궁금해진다. 좁게만 느꼈던 자리가 눈금 앞에서는 의외로 넉넉해 보이기도 하고, 넓다고 여겼던 자리가 띠 한 줄에 금세 끝나 버리기도 한다.
눈금은 눈대중을 지우지 않고 질문을 붙여 준다. 이 골목이 그렇게 좁아 보인 것은 벽의 높이 때문이었을까,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전선 때문이었을까, 어깨에 걸린 가방 때문이었을까? 숫자는 답이 되어 주기보다 질문의 출발선이 되어 주고, 그 출발선에서 골목을 다시 걷는 사람은 같은 길을 처음 걷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게 된다.
03. 뼘과 발과 아름, 몸에서 나온 길이들
우리말에는 몸으로 잰 길이의 이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한 뼘, 한 발, 한 아름, 한 걸음, 한 길 같은 말들이다. 손가락을 활짝 펼친 너비,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린 길이, 팔로 둥글게 감싸 안은 둘레, 사람 키 하나만큼의 깊이가 각자 이름을 갖고 있다. 눈금이 세상에 퍼지기 전에는 손과 팔이 곧 자였고, 그래서 길이를 말하는 일은 자기 몸을 말하는 일이었다.
어릴 때 다니던 골목을 어른이 되어 다시 걸으면 유난히 좁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골목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재는 몸이 자랐기 때문이다. 담은 그대로 서 있는데 손의 뼘도 팔의 길이도 눈의 높이도 그 사이 다른 것이 되어서, 같은 자리를 지나가도 예전의 눈금으로는 읽을 수 없다. 몸이 자라거나 늙는 만큼 골목도 새로 재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 사소한 도구를 손에 들게 만든다.
가로수 앞에서 줄자를 둘러 보려는 사람은 곧 알게 된다. 강철 띠는 둥근 줄기를 따라 순하게 굽어 주지 않아서 자꾸 미끄러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 팔로 먼저 나무를 안고 있다. 껍질이 손바닥에 걸리는 결, 팔 안쪽에 닿는 나무의 온도, 다 안기지 않아 손끝이 서로 닿지 못하는 그 모자란 만큼의 거리. 그것이 이 나무의 굵기를 가장 먼저 알려 주는 답이고, 눈금은 그다음에 온다.
보도블록은 발이 먼저 안다. 블록 한 장을 딛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보폭은 몸이 알아서 맞추고, 들뜬 한 장을 밟는 순간에는 발목이 먼저 기울어 알려 준다. 줄자가 하는 일은 몸이 이미 알고 있던 것에 이름을 붙이는 쪽에 가깝다. 눈금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보다 발이 하던 말을 숫자로 받아 적는다.

04.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들
왜 하필 가로수와 보도블록일까? 간판은 우리를 부르고 메뉴판은 우리를 붙잡고 쇼윈도는 우리를 멈춰 세운다. 가로수와 보도블록은 그 어느 쪽도 하지 않으면서 도시에서 가장 오래 눈앞에 있는 것들이다. 매일 밟고 스쳐 지나가는데도 그 블록이 무슨 색이었는지, 그 나무가 잎을 언제 떨구었는지를 물으면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배경으로 굳는다.
보도블록의 이음새에는 골목이 겪은 날들이 스민다. 같은 무늬가 이어지는 길에서도 비 온 뒤에 물이 유독 오래 고이는 자리가 있고, 틈마다 풀이 삐죽 올라오는 자리가 있고, 떨어진 나뭇잎이 몰려 젖어 있는 자리가 있다. 블록 한 장 한 장은 같은 모양인데 그 위를 지나간 날씨와 사람은 저마다 달랐고, 이음새가 그 차이를 말없이 받아 적고 있다.
잰다는 것은 그 배경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이다. 걸쇠에서 반대쪽 끝까지 띠를 당기는 동안 나무는 저기 서 있는 것에서 내 팔이 닿았던 것으로 바뀐다. 블록도 그렇다. 가지런한 무늬 속에서 유독 한 장이 비뚜름하게 앉아 있는 자리를 알아보게 되고, 그 한 장을 누군가의 손이 어느 날 앉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도시는 갑자기 사람이 만든 것이 된다.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고르던 손들이 한 장씩 이어 붙인 결과라는 생각이다.
줄자를 든 사람의 눈에는 이런 작은 것들이 먼저 들어온다. 도심의 가로수 중에는 뿌리가 내릴 자리가 흙 한 칸으로 정해져 있고 그 바깥은 포장이 덮고 있는 나무가 많다. 뿌리 쪽으로 들려 올라간 블록은 나무와 길이 서로 자리를 다툰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옆에서 줄자를 대 보는 일은 둘의 다툼에 잠깐 증인이 되는 일이다.
05. 에디터의 안목: 눈금이 끝나는 자리에서
땅을 잰다는 일에는 오래된 그림자도 있다. 측량은 땅을 나누고 경계를 긋고 세금을 매기는 일과 함께 다녔고, 재는 자는 값을 매기는 쪽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앨리매거진이 골목에서 줄자를 드는 일이 그와 다른 것은 잰 길이로 아무것도 매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서 얻은 길이는 값이 되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는 흔적이 된다.
줄자에는 끝이 있다. 아무리 길게 뽑아도 띠는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 끝을 지나서도 골목은 이어진다. 잴 수 있는 것이 이렇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이 도구의 가장 좋은 대목일지도 모른다. 줄자는 도시를 다 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방금 손이 닿은 만큼만 안다고 말하게 만든다. 눈금이 닿지 않는 것들도 많아서, 여름 오후 나무 아래 그늘이 가진 온도나 블록 위에서 빗물이 번져 가는 방향 같은 것은 띠 위에 새길 눈금이 없다. 재려고 다가섰다가 이런 것들 곁에 한참 서 있게 된다면, 그 시간이 이 도구가 사람에게 맡긴 진짜 일이다.
주머니에 줄자가 없어도 시작할 수 있다. 손을 활짝 펴서 담벼락에 대 보고, 두 팔을 벌려 가로수를 둘러 보고, 보도블록 몇 장을 걸음으로 세어 본다. 몸으로 재는 길이는 재는 사람마다, 재는 날마다 조금씩 어긋나고, 그 어긋남 덕에 같은 골목이 매번 다르게 남는다. 줄자를 놓으면 강철 띠는 제집으로 돌아가며 딸깍 소리를 낸다. 소리가 그친 뒤에도 손바닥에는 방금 붙들었던 길이가 얼마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