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이라는 괴물이 삼켜버린 '동네의 서사'
새벽 배송과 무인 점포가 편리함을 넓히는 동안, 주인과 나누던 짧은 대화와 '덤'이라는 말은 슬며시 자리를 비웠다.
- 글
- alleymag.
- 발행
- 2026.02.10

01. 잠든 사이에 도착하는 것들
편리함을 나무라는 글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새벽 배송으로 문 앞에 놓인 상자는 밤새 일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침에 처음 만나는 다행일 수 있고,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장바구니를 채울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하루의 마지막 숨 돌릴 틈일 수 있다. 쌀이나 생수처럼 무거운 것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몸은 그 무게에서 풀려났고, 몸이 아픈 날 죽 한 그릇을 문 앞으로 불러올 수 있게 된 것은 예전에는 없던 안도다. 이 안도를 사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분초사회라는 말이 어울리는 하루에서 시간은 돈보다 먼저 바닥나는 재료다. 그 시간을 되돌려 주는 물건이라면 손을 내미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트에 다녀오는 길, 계산대 앞의 줄, 주차장에서 트렁크까지 옮기는 수고가 앱 화면 하나에서 손가락 몇 번으로 끝나고, 끝난 자리에는 온전한 저녁 한 시간이 남는다. 그 한 시간으로 우리는 쉬고, 읽고, 아이와 놀고, 어떤 날은 그냥 누워 있다. 편리함이 건넨 것은 이토록 구체적이다.
장을 보러 가는 길은 원래 물건보다 먼저 사람을 지나치는 길이었다. 단지 앞 골목에 서 있던 과일 트럭, 정육점 유리창 너머로 새어 나오던 불빛, 신발가게 앞에 내놓은 화분 같은 것들을 지나야 시장에 닿았고, 그 사이에는 눈인사가 오가는 가게가 하나쯤 끼어 있었다. 배송이 덜어 준 것은 짐의 무게이면서 동시에 그 길이었고, 길이 없어지면 길목마다 오가던 눈인사가 놓일 자리도 함께 없어진다.
다만 문 앞의 상자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벨도 노크도 없이 놓이고, 도착했다는 알림이 화면에 뜨는 순간 주문에서 도착까지의 길은 사람의 얼굴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채 끝난다. 상자 안에는 주문한 물건이 주문한 만큼만 들어 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렇게 짜인 방식일 뿐이다. 잃은 것은 그 매끈한 완결의 뒤편에서 서서히 드러나며, 그것은 대개 물건이 아니라 말이었다.

02. 덤이라는 말이 놓여 있던 자리
덤은 계산이 끝난 뒤에 도착하는 물건이다. 콩나물 한 봉지를 사면 한 줌이 더 얹히고, 귤을 저울에 올렸다가 눈금이 조금 넘어가도 주인이 못 본 척해 주고, 두부 옆에 고추 몇 개가 슬쩍 들어간다. 덤을 얹는 손은 대개 저울이 멈추는 것보다 빨라서, 손님이 사양할 틈도 없이 봉지 속에 들어가 있다. 여기에는 가격표가 없고 영수증에도 적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장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손에 남는 것은 대개 그 얹힌 한 줌의 무게다.
요즘의 시장에는 덤을 닮은 것들이 많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주는 행사, 쓸 때마다 쌓이는 적립금, 결제 화면에 뜨는 쿠폰. 이들은 정확하고 공평하며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으로 도착한다는 점에서 덤에는 없던 미덕을 가졌다. 반면 덤은 조건을 묻지 않았고, 조건을 묻지 않았기에 받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어서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쿠폰이 내가 쓴 만큼 돌려주는 셈이라면 덤은 내가 쓴 것과 상관없이 건네지는 마음이어서, 비슷한 자리에 놓여도 손에 쥐면 무게가 다르다.
덤이 오가려면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이 닿는 거리에 서 있어야 한다. 주인은 손님의 봉지 크기와 표정을 보고, 손님은 얹히는 것을 받으며 "고맙습니다" 한마디를 내놓고, 그 말은 다시 "또 오세요"로 돌아온다. 이 짧은 왕복이 덤의 몸통이었고, 그 왕복이 오가는 동안 두 사람은 값을 치르고 받는 사이에서 잠깐 벗어나 서로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사이가 되었다. 덤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입에 올린 것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면, 그 말이 입에서 멀어진 것은 물건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왕복이 놓일 자리가 줄어서였을까.
03. 외상 장부에 적히던 것
계산대 아래 서랍에는 한때 공책이 한 권씩 들어 있었다. 가게에 따라 성이나 별명, 자주 오던 시간대가 적히고 그 옆에 숫자가 이어지던 공책이다. "오늘은 달아 놓으세요" 하고 말하면 주인은 물건을 봉지에 담으면서 공책을 펼쳤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은 지갑이 가볍다는 고백과 다음에 갚겠다는 약속이 한꺼번에 들어 있었고, 그 고백을 받아 줄 사람이 계산대 저편에 있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장부는 돈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사정의 기록이었다. 누구는 월말이면 갚고 누구는 형편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주인은 종이에 적지 않고도 알았다. 알았기 때문에 재촉하지 않았고, 재촉받지 않은 사람은 갚는 날 셈보다 먼저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서로의 형편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굴러가는 이 오래된 셈법에는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고, 그 부끄러움을 넘기는 고마움도 함께 있었다.
지금은 카드와 간편결제가 그 자리를 넘겨받았다. 이 방식도 당장의 값을 미루게 해 주면서, 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함께 준다. 결제 단말기 앞에서는 지갑이 가벼운 날의 표정을 감출 수 있고, 장부에 이름이 오르는 일이 없어서 홀가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자유는 분명한 것이다. 다만 부끄러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는 고마움이 생겨날 곳도 함께 줄어든다. 카드는 나를 모르는 채 계산하고, 장부는 나를 알아서 기다렸다.

04. 불이 켜진 무인 점포 앞에서
밤늦게 불이 켜진 무인 점포는 도시에서 꽤 든든한 풍경이다. 아이스크림이 당기는 여름밤이나 갑자기 문구가 필요해진 저녁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이 없다. 물건을 오래 들었다 놓아도 눈치 볼 사람이 없고 계산은 화면 앞에서 혼자 끝낸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쉼이 되는 순간이 사람에게는 분명히 있고, 불빛이 켜져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밤이 있다. 이 가게는 그런 밤을 위해 문을 열어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사말이 없다. 문이 열릴 때 반겨 주는 사람이 없고 나갈 때 등 뒤로 건네지는 말도 없어서, 손님이 남기는 것은 결제의 흔적 정도다. 사람이 있는 가게에서는 하루의 기색이 계산대 너머에서 새어 나온다. 오늘은 비가 와서 손님이 뜸하다는 말, 내일은 과일이 들어온다는 말, 학교 앞 아이들이 시험 기간이라는 말이 계산 사이사이에 오간다. 소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말이라 장바구니에는 담기지 않지만, 그런 말이 한 계절 쌓이면 손님은 이 동네가 어떤 결로 흘러가는지를 몸으로 알게 된다.
동네의 서사라는 말을 거창하게 쓰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오가는 낱말이 쌓인 것이고, 낱말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마주 설 때 쌓인다. 계산대 앞에서 한 번, 문가에서 한 번 오간 말들이 몇 해를 이어지면 그 동네만의 문체가 된다. 무인 점포가 그 서사를 지운 것은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채로 열어 두었을 뿐이며, 그 빈 장에 무엇을 적을지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정할 일이다. 다만 적어 넣을 사람이 없다면 불빛은 밝아도 이야기는 오래 비어 있게 된다.
05. 에디터의 안목: 편리함 곁에 남겨 둘 한 뼘
편리함을 끊어 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새벽 배송도 무인 점포도 결제 앱도 우리의 생활이 원해서 들어온 것이고, 그 덕에 한결 나은 저녁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골목을 오래 걷다 보면 시선이 멎는 곳은 오히려 그 편리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한 뼘의 공백이다. 편리함이 필요를 채우는 일이라면 그 공백은 필요가 아닌 것들이 놓이던 자리였고,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 사람의 손을 어디에 둘지 정하라고 남겨진 자리에 가깝다.
방법은 작다. 한 주 동안 사는 것 가운데 두부나 콩나물처럼 매일 상하는 것 하나만은 사람이 있는 가게에서 사 보는 것이다. 그 가게에서 무엇을 얹어 주려 하거든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덤을 사양하는 예의는 미안함에서 나오지만, 사양은 건네려던 손을 허공에 세워 둔다. 덤은 빚이 아니라 그 가게의 하루에 잠깐 끼어 앉으라는 초대에 가깝다.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한마디 돌려주면 왕복이 완성되고, 그 왕복이 몇 번 이어지는 동안 장부는 없어도 서로를 기다려 주는 자리가 생긴다.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서는 길에 비닐봉지 입구로 대파 한 뿌리의 초록이 삐져나와 걸음마다 흔들린다. 계산대 위에서 누구도 값을 매기지 않은 그 한 뿌리는 봉지 안의 다른 물건들과 나란히 저녁 식탁으로 간다. 문 앞에는 상자가 놓여 있겠지만, 이 길에서는 등 뒤로 건네진 인사가 봉지와 함께 집까지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