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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작20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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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게 지은 집

익선동 한옥은 땅값에 밀려 좁아진 게 아니다. 서민이 살 수 있는 크기로 규격을 정해 지은 집이다. 그 집이 백 년 뒤 지금은 사는 곳이 아니라 구경하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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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9.08
골목
익선동
SCENE 01 : 규격화된 골목

익선동 한옥거리를 처음 찾아온 사람들은 흔히 같은 말을 한다. 아담하다, 좁다, 옹기종기했다. 골목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모여 있고, 문을 열면 꽉 찬 공간이다. 여행객들의 카메라에는 같은 감정이 담긴다. 이 좁음이 정겨운 것, 낭만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그런데 이 좁음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흔히들 떠올리는 답은 정해져 있다. 땅값이 비싸서, 어쩔 수 없이 좁혀졌다는 것, 오래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는 것. 하지만 이 답들은 모두 틀렸다.

익선동 한옥은 저절로 좁아진 게 아니다. 정세권이라는 건설가가 세운 건양사가, 서민이 살 수 있는 크기로 규격을 정해 지은 집이다. 좁음은 계획의 결과다.

살라고 지은 집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건양사를 만들었다. 1920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익선동뿐만 아니라 북촌,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부 전역에 대단지를 올렸다.

당시는 도시가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좁은 골목에 몰려 살았다. 제대로 된 집이 부족했고, 있어도 대부분 비쌌다. 그 사람들을 위해 지은 게 도시한옥이다.

도시한옥은 전통 한옥의 실을 유지하면서도 서민이 살 수 있게 줄인 집이다. 크기를 작게 규격화했다. 구조를 네모 안에 집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수도와 전기를 넣었다.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고쳤다. 그저 물만 있던 곳에서 가를 끌어올 수 있게 했다. 환기와 일조도 고려했다. 한 집을 짓고도 몇 집을 더 지을 수 있는 흙으로 담을 세웠다. 그 모든 것이 서민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뜻이었다.

익선동은 1920년대에 건양사가 계획해 지은 한옥 단지다. 집들은 비슷한 치수로 배열되어 있다. 골목도 같은 너비로 일정하다. 이 규칙성은 자연에서 나온 게 아니라 도면에서 나온 것이다. 누군가의 계획이다.

SCENE 02 : 계획의 미니어처

치수로 정한 조건들

좁은 집에서 살려면 모든 것이 정확해야 한다. 문의 열림이 몸의 폭을 넘으면 안 되고, 안마당은 그저 공기가 들어오는 자리여야 한다. 부엌은 작지만 모든 것이 손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한 평이라도 낭비가 없어야 한다.

익선동 한옥에서 좁음은 단순한 부족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이고, 보살핌이고, 생각이다. 건양사는 큰 집을 많이 지을 수도 있었다. 대신 작은 집을 정확하게 지었다. 누군가는 이 집을 사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방 하나의 크기가 작으면 사계절이 한 방에 든다. 여름에는 환기가 쉽고 겨울에는 데우기 쉬워진다. 골목이 좁으면 햇빛이 들고 바람이 통한다. 이 좁음 덕분에 기계 없이도 집이 숨을 쉰다.

방문객은 요즘 이 공간을 그림 같다고 말한다. 카메라에 담기 좋은 치수, 사진 찍기 좋은 높이의 벽. 하지만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아름다움을 위해 정해진 건 아니다. 살기 위해 정해진 치수가, 백 년이 지난 뒤 낭만이 되었다.

사는 곳에서 구경하는 곳으로

익선동에서 반복해 나타나는 말이 있다. 방문 기록에 "아담하다", "좁다", "외국인 손님이 많다"가 번갈아 나온다. 살기 위해 정한 크기가 지금은 분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이 집들은 사는 사람을 위해 지어진 게 아니다. 구경하는 사람을 위해 쓰이고 있다. 카페가 들어서고, 가게가 들어선다. 한 평짜리 방이 피자 오븐이 되고, 안마당이 사진의 배경이 된다. 살림이 사라지고 조명이 들어온다.

집이 용도를 바꿀 때 그 치수는 고스란히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진다. 좁은 방은 아늑한 카페가 되고, 낮은 천장은 분위기가 되고, 아무것도 펼칠 수 없는 공간은 골목의 한 장면이 된다.

SCENE 03 : 백 년 뒤의 쓰임

규격이 남기는 것

익선동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은 혼란과 일관성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집이 비슷하지만 들어선 것은 제각각이고, 같은 크기의 상자들이 다른 빛을 내보내고, 골목은 정확한 직선인데 걷는 길은 자유롭다.

이 모순이 이 골목을 만든다. 규격화된 크기 덕분에 이곳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 어떤 가게가 들어서든, 어떤 사람이 와도 한옥이라는 틀은 남는다. 그 틀이 이 곳을 지켜낸다.

좁은 집에는 사람이 오래 머물기 어렵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오픈한 카페도,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도 몇 년을 넘기기 어렵다. 큰 브랜드는 더더욱 그렇다. 이 골목은 스스로 들어온 것을 내보낸다. 그렇게 끝없이 새로워지면서도 낡은 모습을 유지한다.

혹시 익선동이 오래 살아 있는 것은, 이 좁음 때문은 아닐까.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는 공간이라서,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자동으로 알려주는 골목이라서. 이 골목은 변하려는 사람들을 받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배웅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한옥은 여전히 한옥이다.

백 년 전 건양사는 서민이 살 수 있도록 집을 지었다. 그 집의 치수를 정했다. 지금 그 치수는 여전히 사람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는 방식만 바뀔 뿐, 살도록 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좁은 방, 높지 않은 처마, 햇빛이 들고 바람이 통하는 구조. 모든 것이 여전히 사람의 몸과 맞아떨어진다.

그것이 이 골목이 지키는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건축학이나 역사가 아니라, 누군가가 여기 살았다는 조건. 누군가의 손으로 정한 그 크기가, 백 년 뒤에도 계속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다.

익선동 한옥마을 및 정세권, 건양사에 관한 서술은 2026년 9월에 확인한 공개 자료에 따른 것이다. 골목의 장면들과 방문객들의 감정은 같은 기간의 방문 기록과 블로그 리뷰에서 반복해 나타난 서술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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