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골목을 온전히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그 안의 모든 서사를 단 한 편의 에세이로 엮어내는 메인 콘텐츠입니다.
성수동의 공식 지명 중에 '카페거리'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구역을 그렇게 부른다. 가죽을 자르고 재봉틀을 돌리던 자리에, 공
1953년에 시작된 떡볶이. 1970년대 후반에 모여 골목을 이뤘다. 1980년대에는 디제이 박스가 있었고,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
신의주까지 가던 철길이 끊기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에는 공터가 남았고, 사람들이 그곳에 공원을 만들었다.
경리단길에서 이름을 빌려온 골목이 용리단길이다. 백 년 내력을 자랑하는 골목들이 있을 때, 이 길은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
을지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인쇄 골목이었다. 밤을 새고 일한 인쇄공들이 교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노가리와 생맥주로 회포를 풀었다
머물 곳이 없던 사람들이 남산 아래 언덕에 모여 동네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다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산다. 해방촌은 처음부터
익선동 한옥은 땅값에 밀려 좁아진 게 아니다. 서민이 살 수 있는 크기로 규격을 정해 지은 집이다. 그 집이 백 년 뒤 지금은 사는
청계천에서 밀려난 철공소들이 왔고, 홍대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이 골목의 두 번의 도착은 같은 이유에서 비롯했다. 싼 자리
서울숲길은 성수동이지만 성수 같지 않다. 바로 옆 연무장길의 북적거림에서 단 몇 걸음이면, 음악이 나오는 카페 대신 나뭇잎이 흔들리는
눈병을 앓던 세종이 이 물에 몸을 담근 뒤로, 임금들은 대궐을 비우고 이 작은 고을로 걸음을 옮겼다. 그 물은 지금도 식지 않고 흐른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좁은 골목에는 왜 그림과 시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까. 서촌은 권력 가까운 자리에서 권력과는 다른 것을 그리던
성수동이 옛것과 새것을 이토록 다정하게 품게 된 데에는 우연이 아닌, 어느 사려 깊은 결정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골목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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