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만의 고유한 온도와 아날로그의 역사를 압축한 첫 문장
종묘 앞 좁은 골목에서 1960년대부터 사과박스 위에 시계를 진열하던 이들이 있었다. 한때 300개가 넘는 점포가 빼곡했던 시계 부품
광장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의도는 공동체였고, 결과는 생존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백 년을 이어온 일은 먹는 것뿐이다.
팔판길은 여덟 명의 판서가 살던 곳이었다. 그들이 매일 밟아 닦은 길이 지금은 관광객의 오르막이 되었다. 권력이 떠난 자리에서 문화가
종묘 담장을 따라 밤을 새던 순라군의 발걸음이 멈춘 자리. 그 길 위에 지금 사람들이 느긋하게 앉아 있다.
시장이 있던 자리에 학생들이 만든 길이 사로수길이다. 이름도 다른 길에서 빌려 왔지만, 만드는 과정은 지금도 계속된다.
연희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궁 연희궁에서 비롯됐다. 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주택들이 들어섰다. 지금 이 골목에는 그 집들 사이
서울을 지은 화강암이 나온 채석장 자리에, 이제 사람들이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한다. 흙에서 나온 것과 손으로 만든 것 사이의 긴 전환
망원정은 높은 곳에서 먼 경치를 내려다보려고 지었던 정자였다. 오백 년이 지난 지금, 이 동네의 매력은 그 먼 경치가 아니라 가장 가
성수동의 공식 지명 중에 '카페거리'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구역을 그렇게 부른다. 가죽을 자르고 재봉틀을 돌리던 자리에, 공
1953년에 시작된 떡볶이. 1970년대 후반에 모여 골목을 이뤘다. 1980년대에는 디제이 박스가 있었고,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
신의주까지 가던 철길이 끊기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에는 공터가 남았고, 사람들이 그곳에 공원을 만들었다.
경리단길에서 이름을 빌려온 골목이 용리단길이다. 백 년 내력을 자랑하는 골목들이 있을 때, 이 길은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
을지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인쇄 골목이었다. 밤을 새고 일한 인쇄공들이 교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노가리와 생맥주로 회포를 풀었다
머물 곳이 없던 사람들이 남산 아래 언덕에 모여 동네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다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산다. 해방촌은 처음부터
익선동 한옥은 땅값에 밀려 좁아진 게 아니다. 서민이 살 수 있는 크기로 규격을 정해 지은 집이다. 그 집이 백 년 뒤 지금은 사는
청계천에서 밀려난 철공소들이 왔고, 홍대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이 골목의 두 번의 도착은 같은 이유에서 비롯했다. 싼 자리
서울숲길은 성수동이지만 성수 같지 않다. 바로 옆 연무장길의 북적거림에서 단 몇 걸음이면, 음악이 나오는 카페 대신 나뭇잎이 흔들리는
눈병을 앓던 세종이 이 물에 몸을 담근 뒤로, 임금들은 대궐을 비우고 이 작은 고을로 걸음을 옮겼다. 그 물은 지금도 식지 않고 흐른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좁은 골목에는 왜 그림과 시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까. 서촌은 권력 가까운 자리에서 권력과는 다른 것을 그리던
성수동이 옛것과 새것을 이토록 다정하게 품게 된 데에는 우연이 아닌, 어느 사려 깊은 결정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골목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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